다행히 수업을 가면 학교에서 학식을 먹을 수 있고 기숙사에서도 아침, 점심, 저녁을 제공하니까 내가 칼질하거나 가스불을 켤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물론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요리하시는 분이 학교에 출근을 안 하긴 해도 가까이 지내는 현지인들이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하기 때문에 굳이 먹는 거에 걱정은 없었다. 뭐, 아무도 초대를 안 하면 나 혼자 고요한 가운데 라면을 하나 끓여 먹으면 되니까 상관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내가 요리할 날이 많았다.
여기 사는 남프랑스 사람들의 말로는 한국인과 만날 기회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첫 한국인이었다. 나에 대한 관심은 곧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 나라가 어디 있는지, 문화는 어떤지, 어떤 종교가 있는지 등 갖은 질문을 받느라 진이 빠진 적도 있었다. 그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건 한국 음식이었다. 일본과 중국 음식은 유럽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한국 음식은 어떤지 접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산지 두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엑상프로방스 대성당 주임 신부님이 연락이 왔다. 크리스마스 준비를 도와줄 수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돕는 데까지 도울 수 있다고 말을 마쳤고 그 다음 날 대성당으로 향했다. 하얀 피부에 뿔테 안경을 쓴 브누아 신부님 Père Benoît은 교구에서 가장 어린 편이었지만 엑상프로방스와 아를을 대표하는 매우 큰 성당의 책임자였다. 그는 평상시에도 다른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아랍계 문화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그날이었다. 브누아 신부님은 나에게 한국 요리를 소개해 줄 수 없겠냐며 물어왔다. 단 한 번도 사적인 부탁을 하지 않았던 분이 이런 부탁을 한 게 의아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내 기뻐하며 "오늘 저녁이라도 제가 한식으로 대접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신부님은 나에게 100유로를 주며,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어. 이거 가지고 장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라며 배려 아닌 배려를 해주셨다.
나는 한국 음식을 프랑스 메뉴대로 전식, 본식, 후식을 나눠서 준비했다.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고민과 메뉴 선정이 필요했지만 (나는 계획형 인간이다) 신부님의 급작스러운 부탁으로 '있는 재료와 조미료'를 사용해서 걸싸한 한식을 한 시간 내에 만들었다. 전식은 된장을적당히 풀어 배추를 푹 삶은 된장국을 준비했고 그 사이에 얇은 소고기를 간장양념에 절여 불고기를 구웠다. 감자채 볶음과 달걀말이도 했다. 감자와 달걀이라는 지구인의 공통 재료로 이런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 디저트로는 호떡을 구웠다. 한국에서 가져온 호떡믹스와 찹쌀가루를 조금 더 섞어서 기름에 튀겨냈다.
그날 저녁 엑상프로방스 대성당 사제관(신부님이 사는 집)에는 브누아 신부님 뿐만 아니라 다른 신부님들 그리고 신학생들도 자리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한국의 식사 예절, 다른 요리 방법 등을 아주 흥미롭게 물어봤고 나는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대답해 주느라 바빴다. 그렇지만 한국에 호기심을 갖고 관심을 보여주는 신부님과 신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 후에 브누아 신부님이 이런 말을 했다. "요리하기 전에 나에게 어떤 음식을 못 먹는지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야.". "아마 대성당이 만들어진 1500년 이래 한국 요리가 식탁에 올라온 건 처음일 거야!"
세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신학 연구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매주 화요일마다 형제애를 나누는 저녁 시간 Soirée pour la fraternité 이 있었는데 전교생을 5~7명씩 그룹을 지어서 모임을 하게끔 했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서 대접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 요리를 좀 한다는 게 소문이 돌았던 것 같다. 평소에 말을 걸지 않았던 동료 학생들도 내가 요리를 담당할 때만큼은 도와줄 게 없냐고 아주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특히 내가 어떤 재료로 어떻게 조리하는지 궁금한 친구들이 많았다. 내가 요리할 때는 언제나 주변에 구경꾼들이 있었다. 한국인 기준으로 마늘을 한 국자를 넣으면 짜증을 내는 프랑스인도 있었고, 고추장을 한 스푼만 넣었음에도 맵지 않겠냐며 핀잔을 주는 녀석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늘 맛이 안 난다며 두 세 그릇을 후딱 치워냈고, 고추장 한 스푼조차 매워서 땀을 흘렸지만 끊임없이 포크를 음식에 갖다 대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아마도 열 번 이상 한식을 요리한 것 같다. 불고기는 물론이고 비빔밥, 김치볶음밥, 절임무생채, 양념치킨, 소떡소떡, 김밥, 잡채, 떡볶이 등 갖은 음식을 만들어냈다. 나중에는 더 이상 한식으로 메뉴를 꾸리는 게 어려워서 아예 중식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짜장면, 어향가지, 탕수육, 달걀탕 같은 거 말이다. 요리하는 게 참 힘들어도 모두가 내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어줬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프랑스를 떠나기로 결정한 날, 그 다음 주에 마지막 저녁 식사가 있었다. 그때만큼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요리를 한 가지씩 준비했다. 마치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듯 나를 위한 송별회를 준비해 준 것이다. 음식으로 한껏 마음이 가까워진 친구들은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 너무 싫어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인지하고 서로를 포옹해 주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들은 나에게 마지막으로 깜짝 송별 선물을 해줬다. 포장지를 뜯어보니 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선물 중 하나가 '프로방스 지방의 모든 음식 레시피'이라는 책이었다. 친구들은 이 책을 주면서, "네가 우리에게 한국 요리를 소개해 줬으니, 네가 한국에 가거든 프로방스(프랑스) 음식을 한국인에게 소개해줘!"라고 말하며 서로의 아쉬움을 달랬다.
음식은 언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다. 누구나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맛보면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열 수 있다. 내가 프랑스에서 한국 음식을 기꺼이 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준 내 프랑스 친구들이 너무 고맙고 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