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박 20여 년 만에, 다시 꺼내보는 것이었습니다.
겹겹이 묶어둔, 색이 바랜 보자기를 풀어내자 보이는 건 낡은 공책 두 권.
공책 표지에는 견고하고 힘 있는 필체로 적힌 문장이 있었습니다.
‘할무이가 물리난 책이다.’
1997년,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친할머니는 여든일곱의 연세로 돌아가셨습니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올해로 백 열 한 세이십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와 언니에게 손수 쓰신 책 두 권을 남겨주셨습니다. 한 권은 한국 고전가사인 <우미인가라>를 필사한 내용이고, 다른 한 권은 <효자문>이라 하여 할머니가 열일곱에 시집간 이후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과 살아 생전 거의 뵙지 못한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일생의 자서전이었습니다.
친할머니는 1910년에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 6.25 전쟁 등등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실로 다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학문을 깨우치기 어려웠던 시절, 할머니는 ‘여자도 글을 익혀야 한다.’라고 생각한, 서당 훈장이셨던 친오빠의 도움으로 밤마다 몰래 글을 배웠다고 합니다.
글쓰기에 재미를 붙인 할머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열다섯 살이던 친할아버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면서 끝내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꿈을 채 펼쳐 보기도 전에, 부모를 떠나 자신보다 더 어린 남편을 두고 살게 된 할머니의 심경은 자서전 첫 부분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초년 역사를 기록한 가사>
오호라 슬프도다 여자 일생 한심하다.
여자 된 것 한이로다.
자녀들아 너의 어미 살아난 역사를 두어 자 기록하니 자자이 들어보라.
전생에 무슨 죄로 여자로 태어나서 생장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옵고 장성하면 여자는 출가하는 법이오니 어찌 옛 법을 어길쏘냐.
-친할머니가 직접 쓰신 자서전, <효자문> 중에서-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친할머니는 저희 집에서 사셨습니다. 당시 여든을 넘긴 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된 부모님이 직접 시골에 계신 할머니를 모시고 올라왔습니다. 할머니는 식사하시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의 대부분을 문지방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어린 저에게도 꽤나 적적하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그런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 건, 책을 쓰시면서부터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할머니와 같이 살게 된 지 1년쯤 됐을 무렵, 하교 후 집에 오면 할머니는 늘 바닥에 엎드려 공책 위로 무언가 열심히 쓰고 계셨습니다. 오랜 필기로 팔이 아프실 때에는 퇴근하고 집에 온 엄마가 할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가 읊어주는 내용을 그대로 공책에 받아 적었습니다. 가끔 엄마가 잘못 받아쓰면 할머니가 크게 호통을 치셨는데 어린 나는 하루 종일 일하고 온 엄마한테 힘들게 왜 저런 걸 시킬까, 할머니에게 내심 미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저 할머니가 심심풀이로 쓰는 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 겨울, 할머니는 저와 언니에게 공책 한 권 씩을 나눠주셨습니다. 할머니가 물려주는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공책을 펼쳐보니 고어(古語)가 많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을 왜 우리에게 주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할머니가 손에서 놓지 않고 열심히 쓰셨던 것을 알았기에 감사합니다, 하고 좋아하는 척을 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빠는 우리가 받은 공책을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장롱 속 깊숙이 넣어두었습니다.
다음 해 봄, 갑자기 집에 내려가고 싶다고 한 친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간 지 2주가 채 못 돼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가 손수 글을 써서 만드신 책 두 권은 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오일장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늘 앉아있던 자리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울었습니다. 생애 첫 이별이었습니다. 아빠는 할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울 때, 남겨주신 책을 꺼내보자고 하셨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는 게 바빠지면서 할머니가 물려주신 책의 존재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그 사이 저는 시사교양국 방송작가로 7년을 넘게 일하다 건강상의 이유로 그만두고, 마케터로 전향했습니다. 마케터의 일도 재밌었지만, 글쓰기에 대한 미련은 마음 한 켠에 오래도록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올 초, 브런치 작가 신청을 통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오랫동안 잊고있던 할머니가 물려주신 책이 떠올랐습니다.
지방에 계시는 엄마에게 서울에 올라오실 때, 할머니가 쓰신 책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책을 가져오신 엄마는 할머니가 남겨주신 책의 내용을 찬찬히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자신이 시대의 운이 없게 태어나 꿈을 이뤄내진 못했지만 저와 언니만큼은 장벽없이 원하는 바, 하고자 하는 바가 다 이뤄졌으면 하는 할머니의 바람도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는 제가 어릴 때 책을 읽는 할머니를 따라서 책도 읽고, 할머니가 글을 쓸 때면 옆에서 같이 일기도 쓰고, 글짓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제가 글에 관심을 갖고 쓰게 된 것도 할머니의 영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래전,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한 자, 한 자, 글을 쓰던 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굽은 등을 기억합니다. 어쩌면 많이 고단하셨을지도 모를, 여든이 넘는 연세로 1년 가까운 시간을 쏟아부어 손수 쓴 책을 남겨주고 떠나신 할머니의 마음은 서른이 갓 넘은 어설픈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제 꿈이자 할머니의 오랜 소망이기도 했던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합니다. 할머니가 남겨주신 책은 저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할 동반자이자, 지치지 않고 꾸준히 글을 쓰게 할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