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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Jun 03. 2020

출국을 앞둔 롱디 커플의 자세

화를 냈다가, 상처 받기 싫어 밀어냈다가

 여행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는 사무실을 정리하러 일찍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미 한국에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빈자리를 대신할 매니저에게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날 밤에도 내내 우느라 빨갛게 부은 눈을 하고서 왜 그걸 오늘 해야 되는 거냐고 물었다. 적어도 출국 전날엔 나와 하루 종일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도 했다. 눈은 붓고, 입술은 되는 대로 튀어나와 흉한 몰골이었을 것이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한 차가 동작구에 다다를 때까지 나의 미간은 구겨져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나의 화를 풀어주지도 않고서 운전에 집중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입을 더욱 내밀었다. 오늘만큼은 그가 내게 맞춰주기를 바랐다. 내일은 그가 나를 두고 떠나는 날이었으니까, 오늘은 무조건 그가 나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남겨진 사람이라는 것이 자존심 상했을지도 모르고, 상처 받기 싫어 그를 밀어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때 나는 그에게 내려달라고 했다. 차는 아직 동작구 어딘가를 달리고 있었고, 나의 집은 홍대였으므로 아직도 한참을 더 가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인 사이에서 가장 부질없는 짓을 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바빴으면 말을 하지, 나 그냥 여기 내려줘, 집까지는 지하철 타고 갈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 여전히 그가 나를 붙잡아주기를 기대했다.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라고, 아니 설령 그렇게 급하더라도 너를 데려다 줄 시간은 있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남은 시간이 너무 없었고, 가짜 마음으로 자신을 밀어내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 이제 진짜 내일이면 가는데 왜 자꾸 그렇게 속상하게 말해. 네가 그러면 나 어떻게 해, 나 오늘 일 꼭 봐야 하는데. 오늘 밖에 안 남았는데 어떻게 해.


 오히려 내게 어떡하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몰랐다. 화도 내 보고, 최후의 방법으로 지질한 자존심까지 내세웠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단념한 채 내려달라고 했다. 나 혼자만 아쉽고 슬픈 것처럼 느껴져 그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아 졌다. 그는 동작역 앞에 잠시 주차를 했고, 나는 여행하는 동안 그가 대신 들어줬던 나의 캐리어를 들고서 깊은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지상에서 지하로, 빛에서 어둠으로. 등을 돌려 내려가는 계단에서, 빨갛게 부은 눈이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붓고 있었다. 분명히 내가 가겠다고 한 길인데 그에게 떠밀려 억지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계단 위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것을 알았다. 나는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긴 계단을 끝까지 다 내려가고 나서야 뒤를 돌아 인사를 했다. 억지로 끌어올린 말이었다. 잘 가- 조심히 가-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홍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그 날 따라 넓어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서 침대에 누웠다. 식은 피자와 딸기를 먹었던 작은 상, 같이 누워 수다를 떠느라 24시간이 부족했던 침대와 같이 실재하는 사물을 인식하기 전에 슬픔이 먼저 떠올랐다. 손이 시리다고 말하면 자신의 따뜻한 손을 내밀던 사람, 전화해서 보고 싶다 말하면 달려오던 사람, 모진 말을 해도 그저 웃으며 넘기던 사람, 내게는 꼭 바다 같아서 힘껏 뛰어들고 싶었던 사람이 사라질 것이었다. 있다가 없어지는 건 처음부터 없었던 것보다 잔인한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나는 평온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수 있지, 그게 뭐 어때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쩜 그렇게 담담할 수 있냐고,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고 환생한 애늙은이 같다는 말도 들었다. 글을 쓰겠다는 사람의 감성이 이렇게 메말라서야 무슨 문장을 쓰겠느냐고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아니었다. 나는 그 날 가슴 밑에서 올라오는 슬픔을 경험했다. 가슴보다 더 아래에서부터 슬픔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베개를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데 나를 둘러싼 세상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온몸의 수분이 증발해 입이 다 마르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이제 떠날 것이고 나는 나의 방식으로 그를 보내주어야 했다. 벌떡 샤워를 하고 집을 정리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내가 할 일이 아주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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