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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May 31. 2020

시한부 이별을 앞두고 떠난 여행

나는 모든 시간을 낱낱이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는 2주 후에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그가 출국을 한다는 사실보다, 나를 배려하지 않고 급하게 잡은 출국 일정에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인도에 갈 생각으로 들뜬 그에게 인도야, 나야 하며 쿨하지 않게 굴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와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우리는 2박 3일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제주에서 돌아오는 다음 날이 그의 출국일이었다. 우리는 3일간 많이 가까워질 것이고 1년간 아주 많이 멀어질 것이었다. 3일의 시간을 낱낱이 기억하고 싶어진 나는 남원읍의 작은 사진관을 예약했다.


 출발하던 날, 나는 먼저 공항에 도착해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 친구, 연인인 것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여행을 가기 전의 설렘이 느껴졌다. 이별 여행을 앞두고 착잡한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채도가 높은 그들 옆에서 나 혼자 회색이 되어 흐려진 것 같았다. 마침 나온 시럽을 뺀 딸기 주스는 맛이 밍밍했다. 동동 떠다니는 딸기가 애처로워 보였다. 나는 음료를 그대로 두고서 카페를 나왔다.


 그는 그러고도 10분이 지나서야 짐을 잔뜩 들고서 도착했다.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그에게 우리의 10분이 얼마나 소중한 줄 아냐며 투덜댔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밥집을 찾았다. 그와 나는 밥, 국, 탕 같은 것들을 좋아했고 그런 우리가 들어가는 식당의 주 손님은 풋풋한 커플보다 중년 부부나 회식 중인 아저씨인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이번 여행은 20대답게 해보자며 SNS에서 예쁜 식당을 추렸다. 그 중 자그마한 마당과 낮은 돌담을 가진 음식점이 눈에 띄었다. 흑돼지 카레와 해녀 파스타가 대표 메뉴인 곳이었다. 잔뜩 기대하고 들어간 그 곳은 밥을 먹는 내내 그와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작았고, 보기에 예쁜 카레는 맛이 없었다. 몇 입 먹어보던 그는 여느 때처럼 미식가 행세를 하며 음식에 점수를 매겼다. 그가 그럴 때마다 나는 꼭 옆에서 반박을 하곤 했었는데 왠지 그 날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이미 너무 익숙해진 장난들이 낯설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순간들이 두려웠다. 나는 애꿎은 숟가락만 휘저었고, 그는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진관에 가야하는 시간이 다 되었을 때쯤 그에게 갈 곳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말없이 어리둥절한 그의 커다란 손을 잡고서 사진관까지 걸었다. 작은 창문에 디지털 카메라와 전문가용 조명이 보이는 사진관에 도착하자 그는 온 세상의 리액션을 다해서 기뻐했다. 나를 아주 꽉 껴안은 그가 날 놓을 때까지 기다리고서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오래된 돌담집을 개조해 만들어졌는데 낮은 창문과 돌담, 마당에서 뛰어 노는 강아지 같은 것들이 아날로그한 사진관의 분위기를 완성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사진사의 차를 타고 스냅 사진을 찍을 동백군락지로 이동했다.


 제주도의 겨울엔 흰 눈 대신 빨간 동백꽃이 내리는 것 같았다. 촘촘하게 자라난 동백나무엔 동백꽃이 아주 많이 펴있었고, 빨간 꽃잎은 흩날려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느낌이었다. 그 곳에서 그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입술을 맞대고, 발걸음을 같이 하며 사진을 찍었다. 너무 어색해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았지만 그와 나는 순간의 표정과 포즈에 최선을 다했다. 참을 수 없이 그가 그리운 순간에 그 사진을 봐야 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가 나를 들어올린 채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동시에 웃었고, 눈빛이 조금 깊어보였다. 나는 그의 깊은 눈빛이 좋았다. 그 눈빛이라면 1년을 버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리는 이 사진을 서로의 방 벽에 걸어두기로 약속하고 조심히 담았다.


 여행의 첫 날이 끝나가는 중이었다. 그가 이틀 뒤 출국하게 될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꾸만 미래 대신 과거를 이야기했다. 불확실한 미래 대신 확실했던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준비해둔 편지지를 두 장 꺼내서 그에게 한 장을 건넸다. 나는 거실에서, 그는 침실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거실로 나온 나는 하얀 대리석 식탁에 빈 편지지를 올려두고서 한참을 생각했다. 이 편지를 무슨 문장으로 채워야 할까, 그 문장이 끝나기 전에 울지 않아야 하는데.


 순간 그가 인도에 간다는 사실과 그 일이 내일 모레 일어난다는 사실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정적 속에서 떨어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침실로 돌아가자 좀 전의 나처럼 편지지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의 잔뜩 웅크려진 어깨를 보다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었다.


 감정이 극에 달하자 울음소리가 이불 밖으로 삐져나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불을 붙잡고, 그는 그 이불을 끌어내려고 힘을 썼다. 그는 내게 제발 울지 말아달라고 했다. 나는 누가 우는 사람한테 울지 말라고 하냐며 마구 울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만 이틀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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