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오랜 시간 속하는 것이 낯설다.
자유롭고 무모하게. 자유와 무모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본 적도 없지만 나는 늘 자유롭고 싶었다. 독립적으로 자신의 것을 쟁취하는 사람들, 오롯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이 늘 있었다.
난 늘 애매한 이단아였다.
중학교 1학년, 나는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5살 터울의 언니가 있던 나는 유행과 화장에 남들보다 빠르게 눈을 떴다. 언니의 비비크림을 얼굴에 잔뜩 바른 채로, 치마를 줄여 입고 다니던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소위 ‘노는 언니’ 무리에 들었다.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우리를 주시했고, 반 친구들은 우리를 조심했다. 주목받는, 그래서 특별해진 기분이 좋았다. 딱 거기까지였다면 좋았을 텐데. 사실 나는 그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주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새벽에 부모님 몰래 집을 나갈 수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결국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그즈음, 이미 선생님과 반 친구들에게 나는 문제아로 낙인찍혀 있었으므로 나는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붕붕 맴돌았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칸 안에 들어가 잠금장치를 걸어두고선 아무도 없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혹여 발이라도 보일까 아슬아슬하게 변기 위에 올라간 채로 수업시간 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종이 끝날 때 즈음에야 잠금장치를 열고 교실로 들어갔다. 화장실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때를 기다려야 했으니까.
시간이 지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지만, 나는 언제나 그곳을 벗어나길 바랐다.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전학 가는 상상을 매일 했다.
고등학교 1학년, 첫사랑을 했다. 입학 전부터 잘생긴 얼굴로 이름을 날리던 그였다. 그는 자꾸만 내게 시답잖은 것을 물었다. 학교 정문에서 학교까지가 몇 발자국인지 아느냐고, 여자가 머리카락을 꼬는 건 무슨 뜻이냐고. 말주변이 화려한 그와 있을 때 나는 자주 웃었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 대신 그와 대화하는 횟수가 늘었다. 50분간의 지루한 수업이 끝나고 나누는 그와의 대화엔 중독성이 있었다. 그다음이, 또 그다음이 궁금했다. 그래서 연애를 했다. 작은 수납함에 사탕과 초콜릿, 편지지를 담아 고백하던 수줍은 그는 사실 내가 중학교 때 어울리던 무리와는 차원이 다른 양아치였다. 담임선생님은 그와 내가 어울리는 것을 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도아가 지금 사귀는 남자가 어떤 애냐면요… …”
하지만, 늘 그렇듯이, 누군가 하지 말라면 더 불타오르는 법이므로, 그와 나는 500일이 넘는 긴 연애를 했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 중 1년 반을 그와 함께 한 것이다. 연애가 끝날 때쯤 그와 나의 세계에는 어딘가 교집합이 생겨나 있었고, 이별 후 내게 남은 건 또다시 애매한 소속감이었다. 시간을 들여 공부해야 하는 과목들의 성적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타고나는 영역의 과목들의 성적은 유지하고 있었다. 어떤 선생님은 나를 문제아라 부르며 경계했고, 어떤 선생님은 따로 불러 밥을 사줄 정도로 예뻐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만큼 친구들과는 멀어져 있었다.
나는 그 친구들과 다시 그 전처럼 친해지지도, 그렇다고 새로운 친구를 사귈 만큼 멀어지지도 않은 채로 남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때에도 언제나 이 곳을 벗어나길 바랐다.
여대를 갔다. 최소한 (연애로 인한) 감정이 나를 휘두를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과대표였고, 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았으며, 친구들과의 사이에도 아무 문제없이 졸업학기를 맞이했다. 담당 교수님은 내게 좋은 일자리를 제안했고, 나는 그 제안을 거듭해서 거절했다. ‘저는 글이 쓰고 싶어요, 방송 작가가 될 거예요.’ 그때 교수님은 진심으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교수님은 벙 찐 얼굴로 ‘나는 네가 전공에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했다. 사실 나는 학기 내내 자퇴를 고민할 정도로 전공에 관심이 없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문예창작과에 가지 말라던 선배의 말을 생각 없이 따랐을 뿐이었다. 정말이지 나는, 긴 시간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이단아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전히 어딘가에 오랜 시간 속하는 것이 낯설다. 6년이란 시간 동안 4번의 퇴사를 거쳐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으니 설명이 따로 필요 없다. 이쯤 되니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런 내가 어린 시절에 영향을 준 것인지 의심쩍을 정도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이제 내가 원할 때면 언제든 졸업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곳이 집이든, 회사든.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원하지 않는 장소에 있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내 학창 시절을 통째로 바치면서 배웠다. 그러니까 혹시 10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를 떠올린다면, 나는 내가 ‘애매한’ 이단아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저 자유롭고 무모하게, 스스로에게 충실했다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