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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 May 18. 2020

장거리 연애를 통보받은 날

젊고 거대한 남자의 눈물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그날은 ‘그의 날’이었다. 하루라도 밖을 나가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나와 온 세상의 행복이 집 안에 있다고 믿는 그가 합의한 내용이었다. 한 달 중 딱 하루인 그의 날엔 절대 부지런하지 않기, 삼시 세끼 배달음식 시켜 먹기, 하루를 꼬박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의 만화책 빌려놓기, 저녁엔 영화 보며 맥주 한잔하기 같은 사소하고도 구체적인 룰이 많이 있었다.


  그날의 장소는 보통 내가 살던 연희동의 원룸이었다. 지어진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는 그 빌라는 요즘 지어진 신축 빌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었다. 집 곳곳에는 집주인 아주머니의 세심한 손길이 닿은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럼에도 왠지 집 어딘가 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깨끗하고도 낡은 느낌의 집이었다.


  약속한 그의 날, 그는 아침 7시쯤 우리 집에 도착했다. 왜 이렇게 아침 일찍 찾아왔냐고 물어보면, 그는 이 하루를 더 많이 온전하게 보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부지런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그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부지런해야만 했다. 나는 스스로 정한 첫 번째 룰 따위는 쿨하게 깨버리는 그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을 떠느라 배가 고파진 우리는, 그 시간에 유일하게 문을 여는 샌드위치 가게에 전화해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햄 터키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그 가게에 직접 찾아가는 것이 더 빠르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방법임을 알았지만, 두 번째 룰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30분을 넘게 기다려서야 샌드위치를 먹었다.


  이 세상의 재미있는 것들은 다 문밖에 존재한다고 믿는 나는 도무지 뭘 해야 할지를 몰랐다. 나의 깨끗하고 낡은 원룸엔 TV나 컴퓨터 같은 디지털 가구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앉아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대뜸 일어나 나의 냉장고를 청소하다가, 곧 쓰러질 것처럼 쌓아놓은 만화책을 펴 읽는 일을 굉장히 신성한 일을 하듯 진지한 표정으로 했다. 본인에게 주어진 엄중한 임무를 완수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 심심한데 홍대 나가서 구경하고 오자, 아니야 오늘은 나의 날이니까 내 말을 들어봐 너는 지금 이게 행복하지 않아?라는 식의 의미 없는 말을 몇 차례나 주고받다 보니 금세 희미한 달빛이 떴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올 이즈음이면 그와 나는 자주 고민에 빠졌는데 주로 영화를 볼 것인가 드라마를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강건한 영화 파인 나는 자고로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으면 결말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고 온순한 드라마 파인 그는 우리를 닮은 소소한 일상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강건했으나 온순한 그의 의견에 지는 날이 많았다. 단지 그가 성대모사를 잘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보고 싶은 드라마의 한 장면을 따라 하는 일이 잦았고, 그 표정이나 제스처가 너무나 우스워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4가지 맛 피자와 딸기를 저녁으로 먹었다. 나는 그날따라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아, 꼭지가 예쁘게 따진 딸기만 골라 주워 먹고 있었다. 다른 음식 시켜줄까, 라는 그의 물음에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온전하게 받아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순간 그는 대뜸, 인도가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사업하는 형을 따라 1년만 다녀오겠다고 했다. 딱 그 시간 동안만 나를 기다려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하다고 했다. 젊고 거대한 남자의 눈물을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저 웃으며 그러라고, 약속할 순 없지만 기다려는 보겠다고 말했다. 2019년 1월,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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