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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화 Nov 02. 2023

내가 나를 잃어버리면 생기는 일

나를 언제부터 잃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확 놓쳤다기 보단 아마도 서서히 날 잃어간 것 같다. 확실한 건 그걸 깨닫게 된 날이 스무 살 여름이란 것이다. 


스무 살이 되었다고 누구나 설레는 건 아니다. 나의 스무 살은 끝도 없이 잠이 쏟아져 맥 못 추는 날이 이어지는 아주 어둡고도 무거운 그런 나이였다. 밥을 먹을 때마다 나의 못난 점이 하나 둘 떠오르곤 했는데 그런 생각을 지워보려 한 술 한 술마다 나쁜 말을 꼭꼭 씹어 넘겨버렸다. 


나는 슬프거나 화나거나 불안할 때면 공책을 펴는 버릇이 있다. 재수할 때 생긴 습관인데 그 당시 나의 공책은 날 것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를 갉아먹는 자존감 도둑이기도 했다. 나와 내가 대화를 한다는 것은 좋은데 친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공책에 적힌 글을 보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코너에 몰고 공격하는 것만 같다. 나는 내 마음이 어떤지, 내 상태가 어떤지 물어보지 않은 채 몰아세우고 힐난하기 바빴다.


결국 마음에 병이 나 여름즈음 재수 학원에서 도망쳐 이불속으로 꽁꽁 숨었다. 


어렵게 재수시켜 준 아빠 엄마에게 보답을 해야 해.

내가 하찮은 존재가 아니란 것을 성적으로 보여주어야 해.

나는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해.


어쩌면 아무도 나에게 무어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를 낭떠러지도 몰았다. 그게 내가 도망친 이유다. 


어떤 시험이든, 어떤 목표든 진짜 되려는 일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 반대로 안 된다는 것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되려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자기만 알 수 있는 그런 느낌이 있다. 나는 압박감에 공부를 했는데 이미 틀렸다는 것을 여름에 직감할 수 있었다. 어떤 것으로부터 평가받기 싫었던 나는 그대로 빤스런 도망치고 말았다. 


삶의 유일한 목표를 잃고 보니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도, 어딜 가야 하는지도 답하지 못했다. 밤마다 나의 쓸모를 생각하다가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다가 잠에 들었다. 정말 무엇보다 날 괴롭게 만든 것은 내가 나를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길을 잃었는데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 그건 참 아득한 일이다.


분명 열 살 땐 되고 싶은 것이 많았고, 좋아하는 것들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나열할 수 있었는데 그러니깐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잃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데려올 수도 없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무서운 꿈에 갇힌 기분이었다. 한 달을 꿈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스무 살 여름밤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를 찾기로 결심했다. 내가 이토록 우울한 것은 무엇이든 자꾸 실패하는 것은 내가 나를 모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있다면 왠지 새로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대학에 간 친구들이 학생증 체크카드를 쓸 때 나는 여전히 10대만이 쓸 수 있는 카드를 썼지만 더 이상 이 상태에 머무르지 않기로 결심했다. 엄마가 채워준 카드를 들고 밖으로 나가 스케치북 한 권을 사 왔다. 가장 맨 앞에 내 이름 석자를 대문짝만 하게 적고 나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도 이젠 조금 나를 알 것 같다란 말을 할 수 있겠다. 내가 나를 찾기 위해 스케치북에 그린 글이 살면서 자신을 잃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지난날의 방황을 매듭지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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