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을 버릴 수는 없고, 연락은 받기 싫고. 나는 카톡을 삭제하기로 결심했다. 가족 이외에는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마 나를 아끼던 누군가는 카톡에 알 수 없음을 보자마자 전화했을 테지만 이미 나는 비행기모드로 바꾼 상태였다. 분명 내가 재수하는 것을 알 텐데 갑자기 잠수라니 친구들에겐 당황스럽고 걱정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의 여유도 사랑도 없는데 어떤 관심이 고마울까. 누군가의 따듯한 위로를 베베 꼬여 듣진 않을까 싶어 차단을 했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구태여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차단은 생각보다 우울을 치유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친구들이 어떻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애인을 만나는지 모르는 게 약이었다. 반년 정도 지났을까.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를 찾는 시간을 가졌던 어느 날, 친구들에게 연락할 용기가 생겼다.
연락이 안 되었지. 미안.
내가 미울까? 아님 아무 생각도 없었을까? 여러 상상을 했다. 용기 내어 톡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참 많이 왔다. 욕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괜찮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친구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를 대학에 가지 않고 알바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면 애들이 날 창피하게 생각할 것만 같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친구를 보며 맞아 그런 것은 없지. 사실 내가 창피한 거야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미안해라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는 못했지만.
심리학 개념으로 분리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으로부터 회피하는 것이다. 분리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주위와 단절하기, 중독적 행동 취하기, 어린 시절 기억 잊기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나는 모든 연락을 끊고 주위와 단절하는 선택을 했다. 그랬더니 대학과 친구들에 대해 조금은 무감각해질 수 있었다. 보고 듣지 않으니 감정이 올라올 일이 없었다.
정말 아무랑도 연락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주위 사람들은 속이 타겠지만 나에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나를 지키는, 우리의 관계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돌아간다면 이 말을 보내 놓고 싶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잠시 아무랑도 연락을 안 하고 싶어. 미안해.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