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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망토 영상쟁이 Oct 22. 2018

영상기자의 동반자

미란다의 고지는 없었다. 평택경찰서로 무작정 연행해가는 경찰의 손에 이끌려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2009년 뜨거운 여름. 사회는 평택 쌍용자동차 파업으로 인해 수십일 간 떠들썩했다. 언론에서도 연일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을 생중계하며 앞 다퉈 속보를 내놓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위에서 취재진들의 열기도 날씨만큼 불타올랐다. 그 당시 난 한 방송사의 *오디오맨으로 영상기자 선배와 그 현장에서 열띤 취재를 펼치고 있었다. 수십일 동안 계속된 파업으로 공장 내부에서 파업하는 노조원들도 하나, 둘씩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또한 생존권 사수를 위해 시작한 파업이었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오디오맨: 영상기자의 취재를 어시스트 해주며 사건현장에 영상기자와 짝을 이뤄 동행한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저 파업현장 분위기를 전달하며 오늘도 이탈자가 발생했고 몇 번째 이탈자인지만 보도해야했을까? 그리고 영상기자는 그 현장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오디오맨으로서의 나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오디오맨을 시작한 이유는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영상기자 옆에서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영상취재 보조를 해주는 오디오맨을 시작 한 가장 큰 이유는 단지 방송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보도국에서 ENG카메라를 좀 더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렇게 시작한 오디오맨 생활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걸리고 전 국민의 관심 쏠려있는 현장 한 가운데 있던 나의 마음가짐은 평소와 달랐다.



찌는듯한 폭염 속에서 며칠동안 계속 되는 파업 현장에 취재진들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노사간의 합의도 쉽게 타결되지 않았다.


속보와 단독이 쏟아져 나오던 처음과 달리 언론사에서 전달하는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그러던 중 나와 같이 동행했던 영상기자 선배가 나에게 오늘 새벽에 공장으로 잠입할테니 낮에라도 잠을 좀 자두라고 말했다. 그 당시 어느 언론사들도 파업현장 내부의 공장모습을 보여줬던 곳은 없었다. 국민들은 파업을 포기하고 나온 노동자들의 경험담만으로는 공장 내부모습이 어떤 상황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핸드폰의 영상은 고화질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도영상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영상기자가 공장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국민들은 현장을 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누구나 찍고 싶지만
누구나 찍을 수 없는 현장.
 
영상기자의 능력은
그런 현장에서 발휘 된다.


개인적으로 공장 안으로 들어가 취재를 하기만 한다면 소위 말하는 단독영상의 현장을 볼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였다. 난 바로 영상기자 선배가 영상취재를 좀 더 편하고 안정적으로 할 수 있도록 카메라 장비를 최대한 최소화 했다. 공장을 잠입하기 위해서는 산을 뛰어 올라 공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보초를 서는 의경들의 교대시간을 체크하고 교대하는 찰나에 산을 오르기로 했다. 시간이 되자 선배와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대화하며 주위를 걷다 의경이 한눈을 판 사이 산으로 무작정 뛰었다.


2시간여를 그렇게 뛰고 쉬기를 반복하며 어렵게 잠입한 공장내부의 모습은 처참했다. 전기가 끊기고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 노조원들의 표정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수도마저 끊겨 물도 부족했고 어두운 곳에는 촛불로 겨우 시야를 확보한 상태였다. 노조원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간 담배 3보루를 가방에서 꺼내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영상기자 선배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차근차근 카메라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취재기자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직접 노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인터뷰도 진행해 갔다. 정신없는 아수라장이었지만 영상기자 선배는 본인만의 리포트를 메모리 카드에 쌓아가고 있었다.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생각 탓일까. 한 노조원은 인터뷰를 진행할 때까지 만해도 생존권 사수를 크게 외치며 열의에 찼지만 가족이야기에 눈가가 촉촉해지기도 했다. 당시 졸린 눈을 비벼가며 노조원에게 마이크를 들이밀던 나였지만 영상기자 선배는 현장을 왜곡하지 않고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 외에도 취재원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공장 내부의 상황들을 영상취재하고 이제 공장 밖으로 나가서 원본을 송출하는 일만 남았다. 당시 송출하는 것은 나의 임무였기에 최대한 빠르게 송출을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야 1분 1초라도 국민들이 공장내부 모습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취재한 탓에 혹시나 빠진 장비는 없는지 확인을 하고 공장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공장 정문을 나오려던 찰나 두 명의 경찰이 다가오더니 선배와 날 붙잡고 무작정 연행해가려고 했다. 미란다의 고지도 없이 그렇게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난생 처음 현행범이란 말을 듣고 경찰서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두근거리고 무서웠다. 하지만 영상기자 선배는 태연한 표정과 함께 괜찮다는 말로 날 안심시켰다. 나와는 다르게 여유있는 영상기자 선배의 모습.



당시 현행범으로 체포되고 있는 모습. (좌: 본인  우:영상기자 선배)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취재하고 나온 취재진을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한다는 것은 경찰의 섣부른 판단이었다. 하지만 당시 선배의 두렴움 없는 모습을 봤을 때 영상기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해야하는 배짱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느꼈다. 경찰서 안에 앉아 있기를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선배와 나는 경찰의 사과와 함께 단순 해프닝으로 경찰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그 당시의 기억은 아직까지 선명하다. 하지만 국민의 알권리와 볼권리를 위해 작지만 무엇인가를 했다는 그 느낌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채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다.



10년 후. 지금 내 손은 장비가방이나 트라이포드 대신 ENG를 움켜쥐고 있다.


파업현장에서 겪은 일련의 경험들이 나를 영상기자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와 같은 오디오맨이 내 옆을 지켜주고 있다. 몸싸움이 치열한 현장이나 사다리 위에 올라가 촬영해야 하는 위험한 현장에서도 언제나처럼 그는 나의 뒤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 사실 영상기자로서 오디오맨 없이 취재한 다는 것은 앙꼬 빠진 찐빵이다. 그들이 없다면 현장에서 일하는 취재반경이 좁아질 것이고 영상기자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요즘같이 초를 앞 다퉈 보도하는 미디어 홍수 속에 신속성도 갖출 수 없다.


“늘 함께 있어 소중한걸 몰랐던 거죠. 언제나 나와함께 있어준 소중한 사람들을~”


이라는 가사말처럼 어쩌면 영상기자들은 하루하루 오디오맨들의 도움에 익숙해져 그 존재의 소중함을 모른채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가족 외에 아니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붙어 다니며 영상기자를 서포트 해주는 오디오맨. 쌍용자동차 파업현장에서 내가 영상기자 선배를 보며 영상기자를 꿈꿔왔던 감정처럼 그들은 나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낄까. 영상기자로서 인생의 동반자인 오디오맨. 그들에게 적어도 부끄럼 없는 영상기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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