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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oia Nov 22. 2018

내가 이 영화를 사랑하는 단 한가지 이유. <중경삼림>

무언가에 대한 이유를 댈 때 가장 성의없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냥' 일 것이다.
그게 왜 싫어? 그냥. 그게 왜 좋아? 그냥. 너 나 싫어하냐? 그냥,어?
하지만 분명히 세상에는 '그냥'이라는 말 말고는 도저히 그 이유를 설명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다. 예컨대 여름마다 자꾸 생각나는 중경삼림같은 것. 왜 좋아햐냐고 물어보면 내 부족한 말주변으로는 도무지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그냥 좋아. 그냥.



만우절날 차인 실연의 아픔으로 매일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았다가 4월 30일에 한번에 꾸역꾸역 다 까먹는 남자와 비도 안오는데 레인코트를 차려입고 잠잘때도 금발 가발과 선글라스를 절대 벗지 않는 여자. 좋아하는 남자 집에 몰래 들어가서 온갖 물건들을 다 바꿔놓는, 요즘이면 가택침입으로 쇠고랑 차고도 남았을 여자와 밖에만 나갔다 오면 집에 있는 물건들이 계속 바뀌는데 눈치도 못채고 런닝샤쓰 바람으로 인형이고 비누고 모든 물건에 말을 거는 남자. 주인공들은 뭔가 하나씩 다 나사빠진것 같은데 계속 보고있으면 불쌍하기도 하고, 그게 또 괜히 멋져보이기도 하고, 바보같기도 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 묘한 감정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냥'이라는 두루뭉술하고도 무책임한 말로 퉁칠수 밖에.


모던한 연출과 있어보이는 미장셴 덕에 이 영화를 그 시절 쿨하고 힙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이 영화 속 사랑은 딱 그들의 팔딱거리는 청춘만큼이나 질기고 청승맞고 질척거리며 찌질하다.
 영화 속 두 남자는 갑자기 떠나간 사랑이 남긴 이별의 고독에 허우적거린다. 그것도 아주 바보같은 모양새로. 괜히 파인애플 통조림 같은 것에 의미부여를 하고 굳이 자기 생일인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인 통조림을 골라 그 전날 서른 개를 다 까먹는 남자와, 혼자 남겨졌다는 쓸쓸함에 괜히 다 써가는 비누에게 '야위었다.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건네고 물기를 머금고 축 처진 수건에게 '그만 좀 울고 강해져라'고 시비를 거는 남자. 둘다 얼마나 미련하고 바보같으며 찌질한가.
 사랑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두 여자도 마찬가지이다. 피도 눈물도 없어 사랑따위는 믿지도 않을 것같은 겉모습의 마약 밀매업자는 전 연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어지고나서도 그가 좋아하던 금발의 가발을 착용하고 다니는 듯하다. 물론 마지막에는 권총 한방으로 그를 없애고 그 가발도 하늘 위로 날려보내지만. 애인 있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의 애인이 떠나가며 대신 전달해달라 부탁한 편지 봉투에 든 집 열쇠를 가지고 매일매일 몰래 집으로 기어들어가 물건을 바꾸는 정신나간 여자에 대해서는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다. 보다보면 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랑이 뭐길래 정말.

 그런데 이게 이 영화를 폼나게 만든다. 가슴뛰게 만든다.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결국 나로 하여금 '그냥' 좋아하게 만든다. 젊은 날에 사랑이란 걸 해서 늘 고독하고, 쓸쓸하고, 미련하고, 막무가내인 그들이 결국은 측은해서 귀여워보이고 어이없어서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이 때 영화 내내 흘러 나오는 축축한 홍콩의 여름 날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듯한 'California dreaming'과 듣기만해도 그 마르고 긴 팔다리로 팔랑거리며 집을 휘젓고 다니는 페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몽중인'이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이미 망했다. 이 말도 안되는 영화와 사랑에 빠졌고, 누군가가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게 됐을테니.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겠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그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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