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다웃파이어> : 추석날 온 가족을 꼼짝 없이 기다리게 했던 명작
어려서 부터 영화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영화에 대해서 만큼은 주변 누구 보다 '조예'가 더 깊었던 듯 합니다.
초등학교 때 '학급신문' 을 만들어서 교실 게시판에 붙여 놓았습니다. 제 기억에 대부분 친구들은 동요 시나 어린이 만화 또는 수수께끼 같은 소재로 꾸며왔는데 저는 신문에서 '주말의명화' 편성표나 잡지에 실린 개봉 예정 작품 소개글을 스크랩 해서 학급신문에 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부터 '할리우드키즈'의 DNA 가 연장되어 현재 그 언저리에서 먹고 사는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감독은 커녕 영화평론가나 영화 매체의 기자가 되지도 못했습니다. 영화는 누구나 쉽게 소비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한 장르이면서 이 시대 최고의 오락물입니다. 저 역시 누구보다 영화 보기를 좋아하지만 오락물로만 즐기기 보다는 영화 한편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 제 삶에서 겪어 보지 못한 간접경험을 최대한 얻으려고 하는 편입니다.
영화라는 소재로 요즘 30-40대 아빠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비슷한 시기에 봤던 영화들과 당시의 분위기 또 그 영화들을 보면서 느꼈던 제 느낌 그리고 그 영화들이 요즘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던지는 메시지들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곧 추석이 다가오니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였을 때로 기억합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 (로빈 윌리암스, 1994)가 이미 전국 약 250만 관객 흥행을 마치고 그 해 추석 대목용으로 안방극장을 겨냥하여 VHS(비디오)를 출시 한 상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아파트 단지 내 상가나 동네 주요 상권에는 비디오 대여점이 꼭 위치해 있었습니다. 저희 집도 여느 집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명절 전날 저녁은 큰집을 방문해서 사촌 형제들과 다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그날 따라 식사 전부터 사촌 형들 중 한명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다 같이 식사를 마치고 신간 대박 영화인 <미세스 다웃파이어> 비디오 관람을 계획 중이었는데 동네 비디오 대여점 마다 이미 테잎이 나간 상태에서 회수가 들어오지 않아 여기저기 전화로 수배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당시 비디오 가게들은 최신작 대박 영화들은 보통 5개-10개 정도 세트를 구비해 놓고 대여를 돌렸습니다. 아마 명절 전날 모든 집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당시 비디오 대여 차트 1위 <미세스 다웃파이어> 섭외에 혼신을 다했을 겁니다. 급기야 동네 비디오 대여점들이 수화기를 내려 놓은 것인지, 예약 주문이 폭주하여 통화가 어려운 것인지 비디오 수배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직접 비디오 가게에서 기다렸다가 받아 올게 !
참다 못한 사촌 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저도 꼭 보고 싶은 마음에 같이 따라나섰습니다. 큰집 문을 나서서 뛰어가면 1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비디오 대여점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의 행방을 묻는 발길은 계속 이어졌고 대여점 사장님 수화기는 역시나 의도적으로 통화중 상태로 내려 놔있었습니다. 그때도 '멘붕'이라는 표현이 있었으면 딱 이었을 듯 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미세스 다웃파이어> 비디오 테잎을 들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다행히 카운터 쪽에는 우리 밖에 없었고 다른 손님들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타깃을 단념하고 대안으로 떼울 다른 영화를 고르는 듯 했습니다. 먼저 '찜' 한게 주인이라는 공식을 적용하기 위해 그 손님이 사장님에게 건네는 테잎을 사촌 형이 번개 같이 낚아챘습니다. 하지만 드디어 구했다는 안도감, 한번에 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던 보람은 없었습니다. 사장님은 이미 순서가 정해져 있다며 전화기 옆에 놓인 대여 노트를 보여줬습니다. 벌써 7-8명의 대기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맛집 식당에서처럼 줄서서 기다리다 보면 곧 우리 순번이 오는게 보이는 희망이라도 있으면 좋았을텐데 한번 나간 비디오 테잎이 언제 들어올지 알 수 없는 무기한 대기를 기다려야 할 판이었습니다. 찔러도 피한방울 나지 않게 생기신 사장님은 포커페이스로 그 노트 맨 윗줄에 적힌 어느 번호로 전화를 걸으셨습니다. 선착순 1번에 이름을 올린 손님에게 전화를 걸어 테잎이 들어 왔으니 대여 가능하다는 안내 전화를 하신 것이었습니다. '갑'과 '을'이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보통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이 손님 집에 전화하는 것은 테잎이 대여 기간을 지나 연체된 상황에서 빨리 반납하라고 재촉 전화를 할 때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때 상황은 명절의 평화를 가져다 줄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기대하는 모든 집들에게 사장님의 전화가 간절한 구원의 손길이었을 겁니다. 전화 신호가 몇 번 울리고 응답이 없자 사장님께서는 맨 밑줄에 망연자실 한 표정으로 대기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촌 형에게 '빅딜 Big Deal'을 제안 하셨습니다.
천원만 더 주시고 지금 가져가서 보시고 바로 반납 해주세요.
그리고 테잎 처음으로 꼭 되감아 오시고요
인생은 타이밍이고 줄을 잘 서야한다는 어느 정도의 세상 진리는 비디오 가게에서도 통했습니다. 때마침 1순위 대기자가 전화를 받지 않아 코 앞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가 '우선협상 대상자'가 되었던 겁니다. 그때 비디오 신작 하루 대여료가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웃돈'을 더 얹은 대여료에다가 '지금 당장 보고 반납'이라는 갑질적인 제안이었어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온 가족에게 즐거운 명절맞이 전야제를 시작할 수 있다는 낭보를 빨리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비디오 테잎을 옆구리에 끼고 냅다 달렸습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어서 다른 식구들은 명절에 특집방송이라고 뻔질나게 틀어댔던 '연예인 노래자랑'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미세스 다웃파이어> 확보 성패 여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온 가족이 상영게 된 <미세스 다웃파이어>.
제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는
유일하고 진정한 가족영화입니다.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는 당시 어린 마음으로 보는 저 뿐만 아니라 집안 어른들까지 큰 웃음을 짓게 하였습니다. 극중 배역 상 할머니로 분장해서 1인2역을 도맡아 한 로빈 윌리엄스의 연기는 '원맨쇼'라고 해도 가히 과언이 아닐 겁니다. (지난 달 로빈 윌리엄스 4주기 추모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정말 많은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최고의 배우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는 경제적으로 무능하지만 세 아이들을 위해서 헌신을 다해 놀아주고 이해해주는 최고의 아빠입니다. 어쩌면 반대로 요즘 아빠들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역할이 아닌지 돌아 보게 합니다.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 주는 것이 힘들어 회사가 집보다 더 편하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집에서 쉬는 날에도 급한 불 끄는 심정으로 아이들에게 스마트폰 영상이나 게임을 쥐어주곤 합니다. 우리의 모습은 영화 속 아빠 다니엘이 이혼을 당하고 직장에서 쫒겨나도 아이들과 함께 할 수만 있으면 더 없이 행복해 하는 모습과는 상반되는 현실입니다. 또한 영화 속에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너무 바쁜 엄마는 세 아이들을 돌봐줄 '훌륭한 조건'의 보모(Nanny)를 애타게 찾습니다. 저도 와이프와 맞벌이를 하고 있어서 두 아들 녀석을 '도우미 이모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운 좋게도 어머니 같이 좋으신 분을 만나서 다행입니다만 아이들이 부모의 손길이 가장 필요할 때 곁에 같이 있지 못하는 현실이 항상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가 더 나이가 들고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많이 놀아주고 싶고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마음 같이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아빠 다니엘은 사회생활과 가정,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보모(Nanny)로 변장까지 하고 고군분투 하여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하게 됩니다. 최근 개봉하는 신작 영화들에 비하면 유치한 설정이고 너무 '고전적'인 컨셉일 수도 있겠지만 근래에 온 가족이 다 같이 모여서 영화를 본 적도 없거니와 또 그렇게 온 가족이 같이 볼 수 있는 가족영화도 나오지 않는 시대에 살면서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제 기억의 진정한 가족 영화로 남아있습니다.
곧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큰집에서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식사하는 모습도 볼 수 없습니다. 언제인가부터 큰어머니도 많이 힘드시고 또 며느리와 조카들도 많이 늘어나면서 한 집에서 그 많은 식구들 밥상을 차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명절 전날 온 가족이 안방극장에 모여 앉아 영화 관람을 하는 모습도 사라졌습니다.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신작 비디오를 줄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이 어느 집에나 하나씩 가입되어 있는 통신사 VOD 영화 서비스를 언제라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세상에 살지만 이번 추석에도 온 가족이 모여서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꼭 명절이라고 해서 온 가족이 모여 영화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만 이전처럼 큰집에 모여 놀았던 때가 그립습니다. 영화까지 같이 보지는 못하더라도 자주 뵈러 갈 수 없는 어머니와 얘기도 많이 나누고 아버지 산소에 가서 아이들 기억 속에 없는 할아버지와 함께 했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저의 어렸을 적 추석을 떠올리면 동시에 오버랩 될 만큼 제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남아있습니다. 최근 명절이 집에 눈도장 찍고 오는 형식적인 날로 전락하였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이 날만이라도 자주 보기 어려운 사촌 형제들과 어울리면서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