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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채홍 Jan 27. 2021

북디자이너의 일과 삶은 어떠한가?

나의 북디자인 분투기

<출판문화> 2020년 8월호에 쓴 글입니다. 그동안 북디자인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장면 몇 가지를 간추렸습니다. 출판문화 네이버 포스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251287&memberNo=50199176)


                                                        

서로 믿고, 우직하게 

서채홍 / 북 디자이너



일관된 메시지로 말하기


“어쩌죠? 이 모습은 실제 과학자의 모습이 아니래요. 다시 그릴 수 없을까요?”
“네?”

출판사에서 전한 저자 의견은 이랬다.

“‘하얀 가운을 걸치고 실험용 보안경을 쓴 채 눈빛을 반짝이며 시험관을 들고 있는 모습’은 미디어가 만들어 낸 것이다. 축 늘어진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마우스질을 반복하고 있는 사람. 성공보다는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사람. 이 모습이 현실에서 우리가 만나는 일상의 과학자에 가깝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만능 해결사로 떠오른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한국 과학기술의 현재와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취지이다. 그러므로(!) 디자이너가 그려낸 과학자의 이미지는 그 의미에 들어맞지 않는다.”

앞뒤 논리가 명쾌하고 지당하였으나 한편 의구심이 일었다. 후드티 입은 평범한 이를 그려 넣으면 사람들이 과학자로 여길까? 과학책으로 보일까? 과연 그 모습이 독자들에게 호감이나 호기심으로 연결될까? 아무래도 이미지 자체가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의견을 피력했으나 저자 입장은 확고했고, 나는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일단 그리고보자고 다시 그렸다.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으로 동작을 만들어 표현을 살짝 과장했다. 레터링 한 제목 글자와 어울려보니 걱정과 달리 웬걸, 나쁘지 않았다. 

책이 나오고 저자 강연회를 할 즈음에야 나는 저자의 판단이, 결과적으로 우리의(저자, 출판사, 디자이너) 선택이 옳았다는 걸 느꼈다.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처음엔 낯선 것이더라도 이를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우직함과 성실함이야말로 어쩌면 메시지 디자인의 가장 기본이 아닐까….



『과학기술의 일상사』,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박대인, 정한별) 지음, 에디토리얼, 2018




아이들과 놀다가 만든 표지


내가 사는 동네 문화센터에서 부모와 아이들 대상으로 만들기 강좌를 한동안 맡아 진행했다. 종이접기, 활 만들기, 부메랑 만들기, 고무 동력 배 만들기 등.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갈고닦은 실력을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니 꽤나 즐거웠다. 종이와 색 필름지로 3D 입체 안경 만들기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진행하던 책 제목이 결정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제목을 듣자마자 유머러스한 느낌을 최대한 살리면 뭔가 재밌는 게 나올 것 같았다. 상당한 확신 없이는 표지에 일러스트를 직접 그리지 않는다. 3D 입체 안경 만들기 강좌를 준비하고 있던 내 뇌에서 알 수 없는 화학작용이 일어났고, 큰 망설임 없이 그림을 그렸다. 제목의 톤과 어조가 표지에 잘 살아났다. 출판사 대표가 키우는 반려견을 그려 표1에 찬조 출연시켰고, 표4에는 출판사 대표를 출연시켰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이런 표지도 만들게 된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회학이군요』,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코난북스, 2017




야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밤


생태, 환경과 관련된 책을 디자인할 때 마음이 한결 편하다. 작업을 하다 보면 어떤 날은 문장이 아닌 단어가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곰, 늑대, 큰까마귀, 흰꼬리사슴, 올빼미, 붉은다람쥐, 검은머리휘파람새,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스트로브잣나무, 너도밤나무, 자작나무, 붉은가문비나무 숲…. 존재 자체가 위로가 되듯 단어 자체가 위로로 다가온다. 단어가 만든 자연에 기대어 잠시 마음을 쉰다. 이럴 땐 디자인 작업 과정이 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페터 볼레벤이 쓴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표지 작업을 막 시작했을 때였다. 지나는 길에 본문 교정지를 전하려다가 출판사 대표님에게 붙들려 즉석에서 표지 회의를 했다. 대화 속에서 나는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숲 속에서』와 『너도 갖고 싶니?』에 나온 숲 그림을 떠올렸다. 군데군데 동물 형상이 숨어 있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적합한 그림 작가를 찾고 출판사·일러스트레이터·디자이너가 수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작업을 완성했다.

베른트 하인리히가 쓴 『귀소 본능』은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집이란, 태어난 곳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동물의 귀소를 인간에 빗대어 삶과 행복을 곱씹어보게 만드는 글솜씨가 매력적이었다. 작업을 하던 중간중간 멈추고 혼자서 화면 속 문장을 되뇌곤 했다. 마감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날, 막내가 전화를 했다. 

“아빠~ 언제 와?”
“아빠가 오늘은 좀 늦어. 12시쯤에 출발할 거 같아.”
“에잉, 나빠”
“….”
“아빠는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거야?”

『귀소 본능』이라는 책을 마감하고 있던 날 막내는 정말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밤이었다.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 페터 볼레벤 지음, 강영옥 옮김, 더숲, 2018


『귀소 본능』,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이경아 옮김, 더숲, 2017



실패하면서 기술 연마하기


2009년, 푸른숲 출판사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정혜윤이 쓴 『언젠가 떠날 너에게 런던을 속삭여 줄게』라는 책에 시도한 장식적인 문자 레터링이 제법 괜찮았던지 폰트 회사에서 문의가 오는 등 작은 반향이 있었다. 이에 고무되어 그 뒤로 글자를 직접 도안해 만드는 레터링을 자주 시도했다. 하지만 공들인 시간에 
비해 성공률은 매우 낮았다. 

1인 디자인 기업으로 독립한 뒤에 청소년 책을 디자인할 기회가 계속 생겼다. 어른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한동안 묵혀 두었던 레터링 폴더를 열어 새로운 시도를 하나씩 채워나갔다. 몇 번의 실패 뒤에 작은 성공이 뒤따랐다. 획 하나의 모티프에서 출발해 기본 획을 만들고, 다른 획을 파생해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성공률이 점점 높아졌다. 꽤 익숙해진 요즘은 여러 분야의 책에 
장식성을 줄이면서 글자의 개성을 살리는 방향을 찾고 있다. 



『우리 시대 혐오를 읽다』 김진호, 이찬수, 김홍미리, 박미숙 지음, 철수와영희, 2019




① 『인권, 세계를 이해하다』 김누리, 이희수, 김효순, 홍미정,  서현숙, 김민 지음, 철수와영희,  2019
② 『10대와 통하는 생물학 이야기』, 이상수 지음, 철수와영희, 2019
③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박병상, 이상수, 심재훈, 이시우, 정상명 지음, 철수와영희, 2020
④ 『스피노자 매뉴얼』, 피에르-프랑수아 모로 지음, 김은주, 김문수 옮김, 에디토리얼, 2019
⑤ 『복종에 반대한다』, 아르노 그린 지음, 더숲, 2018
⑥ 『최명길 평전』, 한명기 지음, 보리, 2019

   





‘확신’과 ‘설득’의 심리학


『풍경이 온다』 표지 시안을 본 출판사와 저자는 몹시 낯설어하며 부정적 반응부터 보였다. 표지 시안에서 출판사와 저자의 첫인상이 나쁘면 설득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안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든 저자와 출판사를 설득하고 싶었다. 수준 높은 독서가인 아내에게 슬쩍 시안을 보여주었을  때도 높은 점수를 받았던 터라 독자들에게 통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무게감 있는 인문서’ 하면 떠올리는 그런 이미지 말고 조금은 다른 시각적 경험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시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시간을 두고 숙고해보길 출판사에 간곡히 권유했다. 며칠이 흐르고 난 뒤, 표지에 대한 인상이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극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번에는 디자이너의 확신을 믿고 한 번 가보는 게 어떨까요?” 

저자의 의견이었다(서영채 교수의 전작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이미 작업한 바 있다). 그 뒤부터는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드물게 행복한 결말이었다. 인쇄되어 나온 책을 처음 손에 받아 들었을 때 밝고 산뜻했으며 또한 묵직했다. 내가 바라던 딱 그 느낌이었다. 책이 나오고 한 달 뒤에 2쇄를 찍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쇄를 찍었다. 독자들이 반응하고 있었다.


『풍경이 온다』, 서영채 지음, 나무나무출판사, 2019



비대면 시대, 시작할 때와 마칠 때의 문서작성 기술


비대면으로 일하는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그러나 의외로 간과하고 있는 기술이 있다. 함께 일한 편집자 중에 일을 시작할 때 항상 디자인 발주서를 꼼꼼히 써서 보내는 이가 있었다. 제목(가제), 분야, 판형, 대상 독자, 유사 도서 등 기본적인 정보부터 시작해서 책의 성격과 내용, 핵심 콘셉트, 저자 소개, 디자인 방향에 대한 바람과 의견까지 빠짐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이 발주서를 읽으면 책의 대략적인 윤곽과 함께 책이 나온 뒤에 서점 어느 매대에서 다른 출판사 어떤 책과 함께 놓여 경쟁하는지까지 그려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편집자가 거기까지 바라보고 생각을 정리해 디자인 발주를 했다는 뜻이 된다. 정성스레 빼곡이 채워 넣은 한 장의 문서가 의례적인 페이퍼워크가 아니라 이후 작업의 기본 좌표라는 걸 디자이너에게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성실하게 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을 시작할 때 전달하는 디자인 발주서는 편집자와 디자이너 간에 오가는 커뮤니케이션의 기초가 된다. 필수적인 정보는 필요할 때 거듭 꺼내어 확인할 수 있는 1~2쪽의 문서가 낫다. 문서에 담지 못한 추가적인 의견은 말로 보태어 전달하면 된다. 디자이너가 구체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다면 책의 성격이나 개요를 파악하기 위해 원고를 뒤적일 일이 적다. 바쁜 일정 때문에 한동안 일을 미뤄두었더라도 발주서만 다시 정독하면 곧바로 새로운 작업 모드로 전환이 가능하다. ‘어, 이 책 판형이 뭐였지? 분야가 뭐더라? 2도였나? 그때 적어둔 메모가 어디 갔지? 아, 전화해서 확인해야 하나….’ 하며 곤란해할 일 또한 없다. 

일을 마칠 때는, 그러니까 이제 인쇄용 데이터를 송고하기 전에는 디자이너가 문서를 작성할 차례다. 판형, 제본, 표지 펼침 크기, 표지 용지, 본문 용지, 면지, 인쇄도수, 별색, 코팅, 후가공까지 필수 기본 양식에 맞춰 작업한 대지와 일일이 대조해가며 쓰는 게 좋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의 오류를 발견해 바로 잡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별색 견본과 면지 등은 사진으로 찍어 문서에 포함시키면 잘못 전달되는 실수가 적다. 이렇게 전달된 문서를 기초로 편집자가 출판사의 제작 발주서 양식에 맞춰 내용을 써넣으면 자연스레 크로스 체크가 되고, 제작 사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것이 비대면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일을 시작하고 마칠 때 반드시 몸에 배도록 익혀야 할 문서작성 기술이다.   



서채홍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끄레어소시에이츠’에서 디자인을 시작했다. 보리 출판사, 푸른숲출판사에서 북 디자이너로 일했다. 현재는 디자인 스튜디오 ‘채홍디자인’ 대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북촌의 네버랜드』(사계절, 2019)를 썼다. 장애가 있는 딸과 두 아들을 키우며 겪은 남들과는 많이 달랐던 부부의 육아 경험과 아이들과 함께 노는 만들기 노하우가 담겨 있다. 

instagram.com/chaehong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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