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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채홍 Jul 02. 2021

환경을 위한 디자인, 무엇부터 할까?

'설득의 심리학 워크북' 리디자인 경험담

환경을 위해 디자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그동안 디자인 일을 하면서 환경에 대한 고려를 딱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뿌연 하늘, 탁한 공기도 모자라 바이러스까지 창궐하는 시대를 맞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환경 문제가 내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있는 디자인 일에서도 환경에 부담이 덜 되는 방향이 있지 않을까?' 그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디자인이라는 것이 대체로 무엇인가를 새로이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이라 필연적으로 기존 산업체계 안에서 에너지를 쓰고, 탄소도 배출하기 마련이다. 오염된 물을 배출하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는 무엇이든 불필요한 것을 줄이고, 덜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바꿔 말해) '꼭 필요한 물건을 오래 쓸 수 있도록 잘(!)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물건 팔 때 끼워주는 사은품이나 굿즈 상품 같은 것도 되도록 안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당장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한번 더환경친화적으로


그러던 차에 “POP(Principles of Persuasion) 설득의 심리학 워크숍” 워크북 리디자인 일을 의뢰받았다. 리디자인의 핵심은 “환경친화적 디자인”이었다. 미국 본사(INFLUENCE AT WORK)에서 만든 워크북을 한글화 하는 작업을 몇 해 전에 내가 맡아서 진행했었다. 그때는 본사의 디자인 아이덴티티를 해치지 않고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다. 나중에 워크숍 참가자들이 들려준 의견을 참고해 한 차례 디자인을 보완했으나, 종이와 잉크 낭비가 적은 좀 더 친환경적인 워크북이면 좋겠다는 참가자들의 의견이 여전히 있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작은 부분에서도 환경 문제를 고려하고 있는 것 같다.


“POP(Principles of Persuasion) 설득의 심리학 워크숍”을 간단히 소개하면, 밀리언셀러 <설득의 심리학>의 저자인 치알디니 박사가 디자인 한 워크숍으로 직접 양성한 공인 트레이너(전 세계에 20명뿐이다)가 이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한국에선 더랩에이치 김호 대표가 유일한 공인 트레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부터 시작해 매년 2-3회 10명 내외의 소규모로만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김호 대표가 새로이 요청한 리디자인의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 환경친화적으로 만든다(가능한 한 잉크와 종이를 줄이고 아끼는 방향, 작은 판형 고려).

- 본사의 디자인 아이덴티티의 핵심은 지킨다. 

- 프린트했을 때나 파일로 화면에 띄웠을 때 모두 잘 보이고, 잘 읽을 수 있게 한다(높은 판독성과 가독성).



빨강을 줄이고, 손에 쏙 들어오는 판형으로 


기존 워크북에서 가장 핵심적인 디자인 아이덴티티는 '빨강'이다. 글자·그림·라인에 두루 빨간색을 강조색으로 썼고, 면적이 넓은 빨간색 박스가 많았다. 이 빨간색 면적과 빈도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줄여 나갔다. 색상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다가 차츰 글자가 눈에 더 들어오기 시작했다. 글자를 각자의 성격에 맞게 크기를 조절하고 부분적으로 색깔을 써서 강약을 조절했다. 


기존 워크북은 A4 용지에 컬러 출력해 링 바인더에 끼워 쓰는 방식이었다. 간편하게 한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책자 형태로 바꾸었다. 판형에 맞추어 글자 크기를 전체적으로 조정하고, 활용도가 낮은 메모 공간은 과감히 없애거나 줄였다. 그리고 워크숍의 특성상 수시로 노트처럼 필기도 해야 되므로 펼쳐 쓰기 좋은 스프링 제본을 선택했다.


워크북과 워크북의 핵심내용을 간추린 리플릿
워크북은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쓰는 필기 공간이 많다.


결과적으로 빨강 면적을 줄이고 판형과 제본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잉크와 종이를 전보다 훨씬 적게 쓰게 되었다. 워크북 부피가 크게 줄어 펼쳐보고 기록하기에 더 간편해졌다. 가방에 넣기도, 보관하기도 역시 간편하다. 물리적인 변화 외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정보도 전보다 단순하고 명료해졌다. 그에 따라 판독성·가독성도 함께 개선되었다. 


디자이너로서 의뢰받는 작업의 우선 순위가 '환경친화적'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고객의 요청이 있었다는 것이 한편 신기한 일이지만 이 우연은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를 일상생활과 일터에서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환경친화적 디자인'은 앞으로 디자이너에게도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instagram.com/chaehong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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