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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채홍 Sep 08. 2022

회사에서 들깨수제비 만들어 먹기

사무실에서 압력솥 돌아가는 소리의 추억 한줌 곁들임

ㅂ출판사에서 추석을 앞두고 몇 가지 곡식을 꾸러미에 담아 보내주었다. 찰보리, 찹쌀 현미··· 그리고 통밀가루가 있었다. 오, 고맙기도 해라. 날이 선선해지면서 들깨수제비가 당겼는데 잘됐다.


다음날 출근할 때 육수 낼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들깨가루를 챙겨 나왔다. 오전 근무에 열중하다가 11시면 잠시 쉰다. 이때 밀가루 반죽을 해서 잠시 숙성시킨다(5분이면 반죽 완성!). 다시 업무. 11시 30분경 냄비에 멸치와 다시마를 넣고 불을 올린다. 곧바로 감자, 버섯, 양파, 마늘을 손질해둔다. 그리고 남은 오전 업무를 살피고 처리한다. 그러다 육수가 우러나면 재료를 차례로 넣고, 밀가루 반죽을 떼어 넣고 간을 하고 들깨가루를 넣으면 들깨수제비 완성이다. 반죽 시간을 합쳐 35분이면 사무실에서 간단한 점심 한상을 차린다(사이사이 업무를 살피면서). 


300ml 이하의 작은 컵 한컵 정도 쓰면 나한테 적당한 1인분 반죽이 나온다. 반죽하면 통밀은 연한 갈색을 띤다.


간소하지만 따뜻하고 뿌듯한 점심. 반찬은 김치 조금만 있으면 충분하다.


음식점에서 파는 맛 못지않다. (내가 만드는 음식 가운데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다.) 그동안 먹어 본 통밀가루는 보통 푸석하고 텁텁했는데 이 통밀가루는 쫀득하니 꽤 맛나다. 기대 이상이다.


ㅂ출판사는 지금은 고객사이지만   번째 직장이기도 하다. 내가 ㅂ출판사 다니던 시절에는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점심을 직접 만들어 제공했다(지금은 달라졌다). 조리실장님이 있어서 매일 밥과 ·찌개류와 함께 여러 가지 반찬을 그날그날의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들었다. 직원들이 돌아가며 점심 준비를 도왔고 대략 1달에 1 꼴로 주방보조 당번이 돌아왔다. 당번은 오전에 11시에 내려가 일을 시작했고, 점식 식사  설거지까지 마치면 오후 2시쯤이었다. 그런 날은 하루가 후딱 지나갔다. 그래도  차린 집밥 이상의 품질에 직원들의 만족도는 컸다.


내가 소속된 부서가 본사에서 나와 한동안 파견근무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그 부서를 이끈 팀장님이 먹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우리가 일할 사무실에 주방시설을 미리 잘 갖춰 놓았다. 그리하여 파견 근무를 나가서도 직접 점심을 만들어 먹었다. 문제는 조리실장님이 없다는 것. 6명이 돌아가며 점심을 준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주방을 책임져야 했다. 나는 아내가 알려준 조리법과 집에서 미리 손질해온 재료로 진땀을 흘리며 겨우겨우 점심을 차렸다. 한 날은 미역국을 끓이는데 아무리 해도 맛이 안 나서 괴로워하는데, 팀장님이 주방에 스윽 들어와서 한 번 맛을 보시더니만 이것저것 넣고 간을 다시 맞추니 놀라운 맛으로 변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릇에 더없이 정갈하게 담아내는 손길까지. 뭐랄까, 업무와 리더십에서 탁월한 분이어서 존경해왔는데 그날 그런 모습까지 마주하니 더 존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주부이기도  여성 편집자의 점심 준비하는 풍경은 나와는 많이 달랐다. 숙련된 솜씨로 재료 다듬는 부터 시작했다. 재빠른 손놀림 속에도 여유가 있었다. 재밌는 대화가 오가는 날도 있었다. 각자 일하다가 가끔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압력밥솥 돌아가는 소리 들리다가······. 그렇게 점심시간을 맞고, 같이 음식을 차리고 나누어 먹었다.


5년 쯤 전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요리를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서도 실용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장애가 있는 딸아이 밥을 때맞춰 차려야 하므로 아내가 집을 비울 때는 내가 할 수밖에 없다는 책임감, 그런 것 때문에 시작했다. 뜻밖에 요리가 잡념을 없애고, 업무 스트레스를 줄이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음을 깨닫고는 더욱 긍정적으로 임하고 있다.


내 아내도 먹는 것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첫 아이가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먹는 것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는 내가 독립해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린 이후 쭉 도시락을 싸주었다. 별생각 없이 먹다가도 어떤 날은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먹는다. 가끔 아내가 챙겨주지 못한 날에는 이번처럼 직접 조리해 먹곤 한다. 코로나 발생 이후로 더욱 굳어진 일터에서의 생활습관이다.


가끔 내가 직접 조리한 간소한 음식을 지인을 초대해 나누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재밌고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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