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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라리 Mar 19. 2020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프리랜서 드라마 PD로 일하고 있다. 있어 보이는 프리랜서라는 단어 뒤에 반은 백수고, 반은 월급쟁이라는 말이 생략되어있지만 어쨌든 하는 일을 말하라면 프리랜서 드라마 PD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단어가 없다. ‘그들이 사는 세상의 주인공들처럼 살거에요.’라는 꿈에 겨운 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드라마 PD 길로 접어들었다.      


전 직장 동료들이 안정적인 회사를 박차고 나간 순간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때때로 던지지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재미는 있어.” 그렇다고 그들이 사는 세상의 주인공이 됐냐고 물어보면 아쉽게도 ‘아직은’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이상이라면 현실은 ‘멜로가 체질’이었다.      


비굴하고 어설프고 막무가내에 가깝다.     




가끔은 내가 3D 직종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쓰레기 직종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촬영 현장에서 수십 번 고뇌한다. 화려한 포장지와 달콤한 초콜릿 속 위스키가 아주 온 몸을 찌릿찌릿하게 하는 느낌이다. 아니 내 경우엔 위스키보다 소주가 더 어울리겠다. 단 것은 너무 빨리 사라졌고, 쓴 맛은 입안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자괴감 따위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저 오늘 촬영만 무사하게 지나가면 그것 또한 소소한 기쁨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오는 그 평온함과 지루함이 이제는 별 사단이 나서 스케줄을 다 소화하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정신건강에 이로움을 준다.   

  

오늘 내가 일반 직장인의 일평균 근로시간보다 도대체 몇 시간이나 더 일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오늘 촬영이 끝이 있듯 이 드라마도 언젠가는 종영을 할 테니 그 끝까지 담담히 인내하는 것. 촬영 종료를 알리기 몇 분 전, 어서 빨리 오늘의 하루를 마감하고 싶어 들썩이는 사람들의 엉덩이를 즐겁게 지켜보는 것. (흡사 학창시절 점심시간 종치기 전 반 쯤 떠있는 엉덩이들 같다.) 그것이 그나마 찾은 이 재밌는 일을 더 재밌게 만들어 줄 것이라 기대할 뿐이다. 


오늘도 나는 기다린다.      


초콜릿 속의 소주가 달게 느껴질 날이 오기를, 모니터 뒤에 앉아있는 감독님이 어서 빨리 이렇게 외쳐주기를.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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