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휴일에도 침대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내가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냐는 친구의 부름에 응답한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잔이 가득 넘치도록 담은 소주 한 잔씩을 걸치고는 2차 장소를 물색했다. 일요일이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사실은 친구와 나 둘 다에게 그다지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테이블 위 빈 접시와 빈 술잔에 절로 손이 가지 않을 때,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추천 플레이스에 인근 재즈바가 떴다. 높디높은 빌딩이 울창한 강남의 한 복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재즈바라니.
서울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금 내 앞자리 앞에 앉아 있던 친구의 손에 끌려간 한남동의 한 재즈바가 생각났다. 즐겨 마시지도 않던 와인잔을 어색하게 손에 들고 낯선 분위기에 한껏 촌스러움을 풀풀 풍기고 있던 내 모습과 대비되는 재즈바 안 풍경의 여유로움과 재즈 선율은 아직까지 드문드문 생각이 나는 기억이었다.
겨울이 주는 특유의 포근한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재즈바는 늦은 일요일 저녁이었지만 사람들이 가득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어둑한 실내의 느낌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 끝자락의 시기를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라이브 공연이 펼쳐질 작은 무대를 바라보는 자리를 찾아 앉고 실내로 들어오자 느껴지는 코트의 무거움을 단번에 벗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서울 사람의 냄새를 풍기며 나이에 어쭙잖게 걸맞은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잠깐의 휴식시간이 지나고 연주자들이 바 한편에 마련된 작은 무대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으레 있을 인사말을 한 두 개 건네고는 피아노 소리를 시작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연주가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소음이 잦아들겠지 했던 내 기대와는 반대로 노랫소리에 파묻히지 않으려 오히려 큰소리로 대화하며 공연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웃고, 떠들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소음과 음악이 섞인 메인 공간을 벗어나 차라리 음악이 덜 들리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 나는 꿋꿋이 음악을 이어가는 연주자들의 눈짓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멋있었다.
자신들의 연주는 관심조차 없는 관객들과 주위를 울려대는 소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오롯이 연주 합을 맞추기 위해 서로 눈맞춤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피아니스트와 보컬리스트 그리고 색소포니스트 세 사람의 눈짓이.
최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드라마에서 등장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연주를 시작하기 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대본의 상황을 연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상황에 놓여 있다 보니 세 사람의 눈짓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면 낯간지러울까.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 보이는 그들의 몸짓과 눈짓에서 마치 공간을 아우르는 힘이 느껴졌다.
그렇게 눈짓 한 번을 대체할 서로가 느끼는 동질감과 이해심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다시금 생각해본다. 말이 담겨있지 않은 대화에서 유독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공감들.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 쑥스러울 때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몸짓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가성비 최고의 위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