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정도의 우울증 의심 (관리 필요)
건강검진 결과에서 가장 내 머릿속에서 오래 머물렀던 진단이었다.
아, 내가 우울감이 있었구나.
삶이 무료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다.
차라리 누군가의 캐릭터가 되어 그냥 움직여주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던 적이 있다.
의지라는 것을 가지는 것 자체가 버겁다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내일이 온다고 해서 오늘과 다를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은 꽤 자주 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서 발현되는 옹졸한 생각들은 때때로 가지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눈덩이처럼 커져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가 있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이런 생각들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나 혼자 뿐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머릿속을 떠오르는 생각들을 단순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이 모든 일련의 생각들로 인해 나는 내가 굉장히 무기력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주저하는 사람이긴 했어도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한 행동까지의 과정이 느리지만 계획적으로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목푯값을 설정하는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본래의 나와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닐까? 본래의 나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이것을 단순히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여기기에는 씁쓸함이 가시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습관처럼 들었던 음악을 멀리한 채 멍하니 있는 시간이 늘었다.
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녀 귀가 아플 정도였는데, 새로 산 에어팟은 며칠을 충전하지 않아도 배터리가 늘 유지되었다.
어떤 가수가 어떤 노래를 발매했는지, 길거리에서 나오는 노래가 신곡인지 아닌지 조차 구별할 수 없다고나 할까.
기쁨에 인색한 사람이 되었다.
하고 있는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때도, 상사로부터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성취감이랄까 뿌듯함이랄까 그런 긍정의 기분을 느낀 지가 오래된 것 같다.
그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감정의 0에 수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느껴졌다.
나 자신을 꾸미는 것이 조금 어색해졌다.
아무 이유 없어도 셀카를 잘 찍었던 것 같은데, 셀카를 안 찍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
혼자서 하는 머리카락 버블 염색도 즐겨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 거의 방치된 채 머리카락이 자라고 자라 인생 최고 길이를 찍었다.
모르는 사이 그렇게 일상에서 서서히 우울감에 잠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구 멸망해라.'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다.
모든 것이 나의 컨트롤 하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감 + 일상의 무료함 정도라고나 할까.
어쩌면 심증은 있었으나 물증이 없는 난항의 수사처럼.
내 상태를 알고는 있었으나 명확한 진단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우울 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을 갈 정도의 심각함은 아니라고 스스로 오만했던 것을 이제서야라도 제대로 인지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0년을 함께한 '나'도 제대로 모르면서
이 캐릭터는 이런 캐릭터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이 대사는 이렇게 말하는 게 맞으며 ~~
드라마 기획이랍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내 모습이 민망해질 만큼 부끄러워질 뿐이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물론 나 자신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