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95] tvN <마에스트라> 세음의 심리적 유연성
'부드러운 카리스마'
세계적인 여성 지휘자 차세음(이영애)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tvN <마에스트라>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문구다. <마에스트라>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오케스트라를 장악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세음이 귀국해 한강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세음은 한강필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키우기 위해 애를 쓴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에 이어 미스터리 한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이 바로 세음이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이었다. 세음은 어떤 때는 시련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지만, 어떤 때는 휘둘리며 무너져 내리곤 했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세음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 차이가 바로 마음의 '유연함'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음이 현재의 경험에 대해 부드럽게 열려 있었을 때 세음은 위기 속에서도 당당하게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마음이 경직되었을 땐 평정을 잃고 휘둘리곤 했다. 이는 마음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밝혀진 '심리적 유연성'이 발휘되었을 때와 그렇지 못했을 때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세음을 통해 '심리적 유연성'에 대해 살펴본다.
'심리적 유연성'이란
'심리적 유연성'이란 '수용전념치료'를 개발한 스티븐 헤이즈가 심리적 건강의 핵심으로 지목한 개념이다. 헤이즈는 '심리적 유연성'을 '개방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이자 현재 순간의 경험에 자발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이며, 가치와 열망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능력으로 고통스러운 것을 외면하지 않고 의미와 목적에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스티븐 헤이즈 저, <자유로운 마음>에서 인용). 여기서 핵심은 고통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안, 우울, 공황, 분노 등 불편한 정서들을 없애려 하지 않고 이를 인식하고 수용한 채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그저 묵묵히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음은 자신이 맡은 오케스트라와 함께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을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지휘자다. 음악에 대한 진지한 열정은 세음이 지휘자로서 품은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인물임을 알게 해 준다. 하지만, 드라마 초반 세음의 모습은 '심리적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레밍턴 병이 발병한 뒤 쇠약해져 버린 어머니를 둔 세음은 유전확률 50%라는 이 병에 자신도 걸릴까 봐 늘 두려워하며 지낸다. 혈액검사면 병에 걸릴 가능성을 알 수 있지만, 세음은 "절반의 희망이라도 사니까"(5회)라며 검사를 거부한다. 그리고선 마치 이런 고통을 생각할 겨를을 주지도 않겠다는 듯 일에만 몰두한다. 이런 상태의 세음에게 음악과 지휘는 자신의 불안과 아픔을 직면하기 않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였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한 부분을 회피한 채 일에 몰두하던 극 초반 세음은 종종 어머니의 병을 떠올리며 불안에 휩싸인다. 실제로 걸리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병에 대해 남이 알까 봐 전전긍긍하며, 제대로 된 건강검진조차 받지 못한다. 또한 자신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마주하지조차 못한다.
헤이즈는 이렇게 무언가를 회피하려 할 때 우리는 실제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막아서는 '내부독재자'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내부독재자'는 마음속에 내면화된 강한 신념이나 사고로, 열린 마음으로 지금 경험하는 것들을 느끼는 걸 막아선다. 아마도 세음은 '레밍턴 병에 걸리면 자신은 끝날 것'이라는 내부독재자의 지배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을 피하려는 마음은 오히려 병에 대한 생각에 휩싸이게 만든다. 또한 그녀의 적들은 '레밍턴 병에 걸릴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것을 무기 삼아 그녀를 휘두르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 수용했을 때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세음의 레밍턴 병 발병 가능성이 세상에 알려지고, 세음은 기자들에게 질문 세례를 받는다. 이에 세음은 이렇게 답한다(6회).
"맞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선 레밍턴 병에 걸리셨습니다. 저 역시 그 병에 걸릴 확률이 50%고요.(...) 근데 전 아직 멀쩡합니다. 저한테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스스로 내려갈 겁니다. 그게 이슈가 될 일인가요? 전 아직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이는 세음이 자신의 상태를 개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심리적 유연성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세음은 아버지를 찾아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오히려 후련해요. 털어놓으니까 별 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를 찾아가 "나 보고 싶어 하는 거 아는데 안 와서 미안해. 나도 엄마처럼 될까 봐 무서웠어"라고 진심을 전하며 어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자신을 수용하고 어머니와 마주한 세음은 레밍턴 병 검사를 받는다.
또한, 단원들에게도 좀 더 마음을 열고, 오케스트라를 떠나려 하는 단원들을 찾아가 함께 하자고 설득하는 등 자신의 가치를 향해 보다 전념한다. 이렇게 세음이 자신의 경험과 타인에게 마음을 열고 대했을 때 단원들 역시 세음을 더욱 신뢰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병에 대한 비밀을 무기 삼아 세음을 괴롭히려던 자들은 무기를 잃어버린다. 이런 세음의 모습은 심리적 유연성을 발휘해 진정으로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건강한 모습이었다.
다시금 경직되는 삶
하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음은 공연 도중 레밍턴 병과 유사한 증상을 경험하고 또다시 얼어붙는다. 힘을 잃었던 '레밍턴 병에 걸리면 끝이다'라는 마음의 독재자가 다시금 고개를 들자 세음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레밍턴 병 검사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았음에서도 불구하고 이 병이 발병했다고 단정 짓는다. 그리고는 단원들과의 약속을 저버린 채 사표를 제출하고 먼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심리적 유연성을 잃었을 때, 우리는 경직된 상태로 자신의 삶을 몰고 간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변의 사람들은 세음이 다시금 지금 여기에서의 경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돕는다. 친구 혜정(김영아)은 "빈혈이 있고 피곤하면 쓰러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고, 단원들은 세음을 찾아와 이렇게 말해준다(10회).
"다들 멀쩡하지 않아. 내 손가락도 그렇고 어깨며 팔이며 손마디 하나하나까지 쑤시고 아프고 그렇지 뭐." (재만)
이는 레밍턴 병에 걸리면 자신은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관점이 아닌 세음의 마음속 내부독재자의 소리였음을 알아차리게 했을 것이다. 때마침 병원에서는 세음이 쓰러진 원인이 '독'에 중독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온다.
그러자 세음은 다시금 마음의 독재자의 소리에서 빠져나와 유연한 마음으로 현재에 집중한다. 병에 걸릴 가능성에 휘둘리지 않고, 일단 지금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실천하며 단원들과 좋은 공연을 하기로 결심한다. 자신과 주변인들을 위협하는 루나(황보름별)를 찾기 위해 경찰과 협력도 하고 말이다. 또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을 하는 것으로 그러니까 음악에 전념하는 것으로 루나를 불러내 위험한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이는 세음이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 중반쯤에는 세음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세음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말이 바로 '부드러운 카리스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어떻게 발휘될 수 있을까. 세음의 마음에 비추어 본다면 이는 고통을 포함한 모든 경험에 수용적으로 열려 있을 때, 그러니까 '심리적 유연성'을 가질 때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세음은 심리적 유연성의 확보가 건강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삶의 위기에 대응하며 스스로를 지켜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함을 잘 보여주었다.
마음이 지어낸 공포와 두려움, 경직된 생각에 사로잡혀 삶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마에스트라>의 세음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래서 고통을 피하지 않고 개방적인 마음으로 삶을 대할 수 있게 되기를, 세음처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삶을 조율해갈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