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06] JTBC <낮과 밤이 다른 그녀>
'저 나이가 되면 무슨 재미로 살지?'
20대였을 때 나는 50대인 이모들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때의 내가 누리던 젊음과 생기, 미래의 가능성이 사라지면 사는 재미 또한 없을 줄 알았다. 그러던 내가 이제 사십 중반을 넘어서 오십에 더 가까운 나이에 이르렀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즐길 거리를 찾으며,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두고 지낸다. 몸은 둔해지고, 작은 글씨를 보기가 힘들어지고, 건강검진 때마다 한두 곳은 꼭 손봐야 하지만, 삶이 재미없어진 건 아니다. 나의 핵심은 20대 때와 크게 다르지 않고 나는 '여전히 나'로 지낸다.
JTBC 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는 나이를 먹고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드라마는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과 인물들 간의 로맨스에 초점을 두지만, 50대 중반인 임순(이정은)과 20대 후반의 이미진(정은지) 두 사람의 삶을 한 몸에 살고 있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젊음과 늙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주고 있다.
나이 들어 버린 '낮'
20대의 모든 시간을 공무원 시험에 쏟아부은 미진은 8번째 시험에서도 고배를 마신다. 그러던 차에 취업 사기까지 당하고, 더 큰 절망에 빠진다. 절망 속에 울고 있던 날. 미진에게 한 고양이가 나타나고, 이 고양이와 만남 후 미진은 낮과 밤에 다른 사람이 된다. 해가 뜨면 50대 중반의 아줌마 임순이 되었다가, 해가 지면 원래 자기 자신인 20대 후반 미진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20대의 미진이 그토록 노력해도 할 수 없었던 취업을 50대 임순은 한 번에 해낸다. 비록 공공근로 인턴 자리이긴 하지만,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지 않아도 된 순은 무척 행복해한다. 밝고, 긍정적이며, 진심을 다해 일하는 순은 검찰청에서 인정을 받고, 계지웅(최진혁) 검사의 사무보조로 일하게 된다. 순은 그 누구보다 즐겁고 성실하게 일한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다시 미진이 된 순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일해보니까 마음만은 이팔청춘이란 말 뭔 말인지 알겠더라." (5회)
이는 20대의 내가 40대 중반이 되고서야 깨달은 그 진실을 미진이 순으로 살아보면서 알게 됐음을 고백하는 장면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내면의 열정과 삶에 대한 태도,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욕구는 변하지 않는다는 진실 말이다. 드라마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낮 동안에 50대로 살도록 설정한 것도, 나이 듦이 삶 자체를 축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나이' 그 자체는 순에게 별 제약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늙음'을 대하는 태도는 순을 펑펑 울게 만든다. 순이 지웅의 사무보조로 일하게 됐을 때 지웅과 수사관 병덕(윤병희)은 "나이 든 아줌마와 어떻게 일을 하냐"고 반발하며 순을 나가게 할 궁리를 한다. 갑자기 50대가 되었을 때도 울지 않던 순이 펑펑 우는 건 바로 이런 편견과 차별을 인정해야 했던 때다. 순은 지웅에게 야단을 맞았던 날 사무실 사람들이 자신을 내치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며 스스로를 안쓰러워하면서 펑펑 운다(5회).
어쩌면 현실의 우리가 나이 듦을 터부시 하는 것도 이런 편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 할 수 있는 것들이 적어지고, 삶의 재미 또한 사라질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나이 듦을 두려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드라마 속 순이 그랬듯, 오십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내가 그렇듯, 나이를 먹어도 삶이 쪼그라들지는 않는다.
드라마 속 지웅과 병덕은 순과 함께 지내면서 점차 순의 능력을 인정하고, 편견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순 덕에 수사에 도움을 받는다. 이들은 순과 가까이 지내며 '편견'에서 벗어나 '한 사람'으로 순을 존중했다. 우리 역시 이럴 수 있다면 좋겠다. 나이 듦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날 때 삶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깜깜한 '밤'의 젊음
순은 해가 지면 20대 후반의 젊은 미진으로 돌아온다. 퇴근해서 쉴 때, 친구와 여가를 즐길 때는 20대 미진으로 지낸다. 그래서 가족들은 미진의 달라진 모습은 전혀 모른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돌아온 딸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밤에만 '젊어지는' 것일까.
친구도 만나고 클럽도 가고 여가도 즐기고, 나름 공부도 할 수 있겠지만, 밤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람들은 잠을 자는 데 쓴다. 나는 이런 밤을 젊은 채 지낸다는 설정이 마치 요즘 청년들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순과 미진으로 살기 전 미진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진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마인드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지만, 미진에게 돌아오는 건 절망뿐이었다. 이런 미진이 밤에만 산다는 것은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암흑 같은' 청춘들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희망도 보여준다. 낮 동안 순은 지웅의 사무실에서 여러 업무를 척척해 내는데 바로 그 능력의 자양분이 젊은 미진의 아르바이트 스펙이었다. 클라이밍장 청소 아르바이트는 암벽등반을 가능하게 했고, 타자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한 서류 정리를 가능하게 했다. 심지어 젊은 날 게임을 하며 보낸 밤도 순에게는 중요한 자원이 된다. 이는 비록 깜깜한 젊은 날을 통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쌓은 경험이더라도 언젠가는 쓸모 있게 사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미진과 순은 '같은 사람'
여기서 기억해야 할 건 순과 미진이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순 덕분에 목숨을 구한 고원(백서후)은 순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위로를 받고,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고원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순이 일몰과 함께 미진으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 후 순과 미진을 관찰하던 고원은 두 사람이 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고원은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과 미진을 '한 사람'으로 대한다. 미진을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 순도 아껴주며,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이는 외모보다 순과 미진이 지닌 내면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활기차고 매사에 성실하고, 배려심 있는 마음 씀씀이는 미진이나 순이나 다를 바 없을 테니 말이다.
순과 미진이 같은 사람임을 최초로 알게 된 미진의 친구 가영(김아영)도 마찬가지다. 처음 순이 자신이 미진이라고 이야기할 때 도저히 믿지 못하던 가영은 미진이 "난 한 번도 노력한 걸 못 이뤄봤다 아닌가.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보고 싶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얼마나 잘할 있는지"라고 말했을 때 "맞네. 이미진이네"라며 반가워한다(4회). 나이가 들어도, 고유하고 중요한 삶의 가치만은 변하지 않기에, 같은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그렇다. 나이를 먹어보니, 신체는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내 안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고원이 순과 미진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가영이 미진임을 알아볼 수 있었던 그 어떤 고유함을 우리는 각자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면서 흰머리가 생기고, 몸매가 변하고, 젊었을 때와는 다른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어도 '내가 나'라는 감각을 유지하며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유함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마땅한 것일 테다.
드라마를 보면서 20대 때 50대 이모들을 보면서 했던 생각이 얼마나 교만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이를 먹어도 젊었을 때와 똑같은 삶의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젊다고 해서 늘 행복한 것만도 아니다. 그리고 젊든 나이가 들었든 내가 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이 듦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진이 순이 됐다고 해서 미진의 본질이 사라지지 않듯, 나이가 들어도 나답게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 이런 '고유함'을 서로가 더욱 존중해 주길 바란다. 그래서 젊은 날의 혼란을 무사히 통과해 내면서 겁먹지 않고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