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14] tvN <가석방심사관 이한신> 지동만
나는 평소 새벽에 글을 쓴다. 이른 아침에 가장 머리가 맑은 데다 새벽의 고요 속에 문장을 적어 내려갈 때면 마음마저 평화로워지기 때문이다. 나의 몸도 이를 즐기는 듯, 언제부턴지 알람 없이도 새벽 5시면 눈이 떠진다.
그날도 그랬다.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 침대에서 나와 세수하고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습관적으로 포털 사이트의 화면을 열었는데 '계엄령'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자세히 뉴스를 읽을 겨를도 없이 '쿵'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계엄은 전시에나 가능한 건데 정말 전쟁이 났나?' 싶었다.
하지만, 곧 알았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고, 몇 시간 후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했다'는 게 그날의 핵심이었다. 전쟁이 아닌 건 다행이었지만, 이 또한 너무 충격이라 나는 머리가 멍했다. 새벽의 평화는 깨졌고,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새벽엔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대신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아침을 맞았다. 그러다 나는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속 한 인물이 떠올랐다. 바로 tvN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 속 지동만 회장(송영창)이다.
지동만 회장의 불안과 분노
동만은 세상을 호령하는 오정그룹의 총수다. 그가 비자금 조성 및 배임 혐의로 구속되자 '지동만이 구속되면 나라 경제가 망한다'며 그의 석방을 바라는 시위대가 몰려올 만큼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도소에서조차 그는 여전히 재벌총수고 모든 것을 호령하는 존재로 지낸다.
동만은 수감자복을 입지만, 대기업 회장실과 별다르지 않게 꾸며진 방에서 생활하며, 안마의자에 앉아 직원들을 접견한다. 교도소 내에서 마사지를 받고, 음식은 외부에서 공수해 먹는다. 심지어 이혼한 아내가 데려간 반려견이 보고 싶다 하자, 집사 변호사 한신(고수)은 기지를 발휘해 그의 품에 반려견을 안겨 주기도 한다.
그런데 동만은 이런 대접을 받으며 아무 불편 없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수시로 버럭버럭 화를 낸다. 그냥 소리만 지르는 게 아니라 물건을 집어던져 직원들의 얼굴에 상처를 내기도 한다.
특히, 동만이 더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순간은 자신의 가석방과 관련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다. 동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석방을 받아내려 하지만, 부정의한 가석방을 막기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한 집사 변호사 출신 가석방심사관 한신은 동만의 가석방을 막아선다. 애써서 만들어낸 가석방 기회가 한신 때문에 무산됐을 때, 가석방 심사 자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만의 모습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2회).
통제 불가능할 때 생기는 불안
동만은 불안에 사로잡혀 이성도 도덕도 모두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불안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 중 하나다. 위험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불안은 이에 대처하는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며, 인류의 생존을 도와왔다. 또한, 인간은 삶의 끝에 '죽음'이 있음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실존적 불안을 피해 가기가 힘들다. 즉, 인간에게 불안은 필수적인 감정인 셈이다.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대표적인 상황 중 하나가 바로 '통제 불가능할 때'다. 시험 결과 발표를 앞두고 불안한 것, 불확실한 미래를 떠올리면 안절부절못한 마음이 드는 것, 처음 접하는 일을 하기 전에 불안해지는 건 모두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담심리사로서 이런 불안을 회피하지도, 불안에 휩싸이지도 않고 수용하고 견뎌낼 힘을 기르는 게 정신 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불안을 견뎌내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을 수용하는 법도 배우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석방 심사관 이한신> 속 동만처럼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해오며 살아온 인물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즉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는 게 더 힘이 든다. 동만이 가석방이 되지 않았다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볼 때면,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을 버리지 못한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음대로 안 되면 되게 하라고 길바닥에 드러누워 마구잡이로 떼를 쓰는 그런 아이 말이다.
심리학적으로 유아기 때는 '전지전능한 자기'를 갖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적절한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아이들은 차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을 수용하고 통제할 수 없을 때 생기는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간다.
그러나 적절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하면 성인이 돼서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아마도 동만은 적절한 좌절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성장한 인물로 보인다. 권력과 돈을 모두 지닌 재벌총수로서 자신이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온 듯싶다.
계엄에 느껴지는 윤대통령의 불안
그리고 나는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불안해하고 분노하는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윤 대통령의 말에도 느꼈다. 그가 계엄을 선포한 걸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국회가 판사를 겁박하고, 행정부 주요 인사들을 탄핵하고, 치안 예산과 재해 대책 예비비를 삭감하는 등 국정을 마비시켰으니 반국가세력이며,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걸 반대하는' 이들을 반국가적인 인물로 규정하고 이를 척결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하겠다는 걸로 받아들였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계엄령이라는 권력을 휘두른 것이다.
윤 대통령의 심리를 추측해 봤다. 예산안에 대한 불만 등 그가 언급한 걸 보면, 최근 자기 뜻대로 처리되지 않는 일들을 곱씹으며 불안에 휩싸이지 않았을까. 물론 개인적인 추정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든 불안에 휩싸여있을 때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 힘들다. 드라마 속 동만처럼 감정적인 분노를 폭발시키기도 하고, 비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 쉽다.
나는 대통령의 성장 과정을 알지 못한다. 왜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됐는지도,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는 마음을 갖게 됐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느껴지는 불안을 수용하지 못하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불안을 없애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게다가 그런 사람이 한 국가를 통치하는 권력을 지니고 있다면, 민주주의에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건 안다.
<가석방 심시관 이한신> 속 동만은 끊임없이 자신을 방해하는 한신을 통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견뎌내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좌절에 조금씩 익숙해져서일까.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가석방을 도모하고 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전처럼 감정적으로 폭발하거나 '버럭'하는 빈도는 줄어들고 있다. 감정적으로 차분해지면서, 동만은 점점 더 지략적으로 사고를 한다. 그 지략이 안하무인에 생명마저 경시하는 비윤리적인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이 윤 대통령이 '좌절'을 배울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권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걸, 불안을 수용하고 이를 견뎌내는 가운데 성숙한 삶이 있음을, 국민들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서 배워보길 바란다. 그리된다면, 대통령이라는 자리에서는 물러나게 되겠지만, 적어도 한 인간으로서는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 역시 그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일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