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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라이딩'에 인생을 거는 이유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120] ENA <라이딩 인생> 

by 주연 Mar 20. 2025

 "아이가 중학생이 되니까 주말에도 꼼짝을 못 하겠더라고. 국영수 외의 과목들은 주로 일요일에 강의가 있어서 이젠 캠핑 못 갈 것 같아. 학교는 체험활동 쓰고라도 여행 갈 수 있는데 학원은 한 번 빠지면 진도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이젠 주말에도 '라이딩'이나 열심히 다녀야겠어."


 주말마다 캠핑을 다니는 걸 좋아했던 내 이웃은 얼마 전에 캠핑 장비를 처분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이웃은 '아이들은 자연에서 뛰어놀며 배운다'는 명제를 열심히 실천하는 가족이었다. 주말마다 자연 속에서 자라나는 이웃의 아이들이 참 보기 좋았던 나는, 이 말에 공감이 되면서도 서글픔이 밀려왔다.


 돌아보면, 아이들이 자라나고 다니는 학원의 수가 많아지면서, 평일이든 주말이든 아이의 학원 스케줄에 이 우선인 이웃들이 참 많다. 솔직히 일명 '대구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데서 아이를 키우는 나도 이런 분위기에서 완전히 예외는 아니다.


 도대체 한국의 부모들은 왜 이렇게 '학원'에 일상을 저당 잡히는 걸까. ENA <라이딩 인생>은 부모들의 이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라이딩'에 인생을 거는 부모들


▲명문 사립 명성초의 추첨이 있었던 날 엄마들은 학부모들은 빨간 옷을 입고 추첨에 참석, 아이가 당첨되길 간절히 바란다.▲명문 사립 명성초의 추첨이 있었던 날 엄마들은 학부모들은 빨간 옷을 입고 추첨에 참석, 아이가 당첨되길 간절히 바란다.


 7세 딸을 둔 워킹맘 정은(전해진)은 딸 서윤(김사랑)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교육에 정성을 쏟는다. 그중 하나가 유명 영어학원 '빅파커'에 보내는 것이다. 정은을 대신해 서윤의 유치원 등하원과 학원 '라이드'(차량 이동)은 젊은 시터이모가 맡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작스레 시터와 연락이 끊긴다.


 시터가 사라진 후, 며칠간 정은은 회사에서 잠시 나와 서윤을 차로 데려다준다. 교통체증에 주차할 공간까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정은은 서윤을 안고 등에는 무거운 가방을 메고 뛰어서 학원에 데려다주기도 한다(1회). 그러다 대학병원에서 미술치료사로 일하는 친정엄마 지아(조민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지아가 서윤의 라이딩을 맡게 된다.


 드라마는 이 과정에서 '라이딩'하는 부모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아낸다. 학원가 등하원 시간이면 더욱 심각해지는 교통체증과 주차대란을 매일 겪어내고, 서로 경계하면서도, 정보를 많이 가진 부모와 친해지려는 속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물론, 현실보다 좀 더 극적이고 과장되게 묘사된 부분도 적지 않다. 하지만 소문난 학원의 설명회 초대권을 얻기 위해 새벽부터 줄을 서고, 정보에 밝은 부모와 친분을 쌓기 위해 애쓰는 일들은 늘 내 주변에서도 벌어진다. 나 역시 학원에 열심인 이웃에게 설명회에 데리고 가달라며 커피 쿠폰을 쏜 적도 있다.


 다만, 현실의 부모들은 안다. 이런 '라이딩 인생'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엄마들끼리 모이면 학원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라는 푸념이 늘 따라붙는다. 그리고 대화의 늘 결론은 이렇다.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뒤처질 순 없잖아."


대한민국의 부모는 불안하고, 아이는 아프다


▲드라마 <라이딩 인생> 중 한 장면▲드라마 <라이딩 인생> 중 한 장면


 도대체 왜 부모들은 저항감을 가지면서도 '이렇게까지 하면서' 사는 걸까? 나는 드라마 속 부모들을 보며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정은은 일터에선 부당한 대우를 받는 후배를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정의로운' 상사지만, 서윤의 교육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정 수량만 입고된 영어교재를 사기 위해 전략적으로 새치기하고, 접촉 사고가 난 상태에서도 상대방이 가지고 있던 영어교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1회). '빅파커'의 실세인 민호엄마 호경(박보경)과 친해지기 위해 서윤에게 민호(권율)와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하기도 한다(4회). '빅파커'에 다니는 또 다른 아이의 엄마는 서윤의 시터를 가로채고도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호경은 민호가 1등이라는 이유로 다른 부모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한다.


 이처럼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아이의 교육에서만은 기본적인 예의도 무시할 만큼 시야가 좁아져 있다. 사람의 시야를 좁아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정서가 바로 '불안'이다. 불안할 때 우리는 주변을 살피지 못하고 불안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애를 쓴다. 드라마 속, 그리고 현실의 많은 부모들이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기에 아이들을 밀어붙이고, 학원에 안 가면 '큰일 난다'고 느끼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이 부모들을 이렇게 불안하게 하는 걸까? 명성초 추첨에 떨어진 후 정은이 내뱉은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명성이 우리 서연이 스타트라인이 될 줄 알았는데." (4회)


 이는 드라마 속 세상이 명문학교의 인맥 안에 들어가야만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학벌과 학력으로 계층화된 사회임을 잘 알려주는 대사였다.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양한 직업이 존중받지 못하고 계층 간 차별이 심해지기에 부모들은 어떻게든 아이가 '좋은 학교'에서 시작해 '좋은 대학' 혹은 '의대'에 진학하기를 그토록 바라는 것일 테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봐 불안에 시달린다.


 그 결과 아이들은 아프다. 1등 민호는 긴장감을 못 이겨 손톱을 물어뜯고, 미술치료를 받으러 온 수찬은 학원에 대한 압박으로 공황장애까지 겪는다. 밝아 보이는 서윤조차 "1등 하면 엄마가 좋아할 거예요"라며 스피치 대회에서 꼭 1등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3회). 상담심리사로 일하는 나는 서윤처럼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오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내담자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왔다.


내 아이에게 집중한다면


▲ 드라마 <라이딩 인생>중 한 장면▲ 드라마 <라이딩 인생>중 한 장면


 이런 현실을 타개하는 방법이 있기나 할까? 입시제도가 아무리 바뀌어도 사교육 경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걸 보면, 달라지는 입시제도는 오히려 불안감을 유발, 학원가로 학부모들을 더 몰려들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교육제도의 개선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자체가 직업이나 학력으로 사람을 위계화하지 않고 각자의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풍조로 바뀌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인 변화는 정말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초점을 바꿔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시선을 자신들의 아이가 아니라 사회나 타인의 평가에 두고 있다. 정은은 서윤이 원하는 것보다 다른 부모들이 좋다 하는 것, '명문'이라 남들이 말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 호경은 손톱을 물어뜯는 민호의 마음을 살피기는커녕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겠어?"라고 핀잔을 준다(2회). 드라마 속 어떤 부모도 아이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학교를 가고 싶은지 물어보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다. 어릴 때부터 공부 좀 한다 하면 '의대'에 가는 걸 당연하게 여기도록 아이들을 조련하고, 아이의 마음보다 유명학원 레벨테스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들은 내 곁에도 있다.


 하지만, 남들이 좋다는 것보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것, 내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에 초점을 둬보면 어떨까? 그렇다고 현실이 금세 바뀌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의 다양한 마음에 초점을 두는 부모들이 많아진다면, '라이딩 인생'이 당연해 보이진 않을 것 같다. 아이가 사회에서 존중받는 위치에 있기를 바라며 '라이딩'하는 것이라면, 존중받는 계층에 집어넣기 위해 애쓰기보다 가정에서부터 존중받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한 학원의 설명회에 다녀왔다. 그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이 밀려왔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학원에 등록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아이의 의사를 물었다. 아이는 "지금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가 아닌 학원을, 주변의 말에 더 초점을 주고 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다.


 '아이들은 믿는 만큼 자란다.'


 학원보다 아이를 더 믿는 부모들이 많아지기를, 서로의 마음이 불안해질 때 '아이'에게 초점을 옮길 수 있도록 돕는 이웃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기형적인 한국의 교육 현실을 조금씩 바꿔나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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