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 09 <목정원의 관객 학교> 리뷰
공공그라운드 "텍스트클럽"은 텍스트를 매개로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텍스트클럽의 관객, ‘텍스트클러버’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창작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일방향의 경험이 '읽고 나누는' 쌍방향의 입체적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우주
사진 | 공공그라운드
공연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사라짐에 있다. 회화와 같은 공간예술이 한 번 완성되고 나면 공간 속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달리, 연극과 같은 시간예술은 시간에 깃들어 발생했다가 그 흐름과 더불어 종결된다. 작품의 존재는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오직 그 시간 속에서만 유효하다. 관객은 사라짐의 목격자가 되어 영영 혼자만 알아볼 흐릿한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선다. 더 이상 존재가 없으므로 점차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중 어떤 기억은 되바꿀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몸에 기입된다. 그렇다 해도 흔적이 남는 것과 존재가 남는 것은 아득히도 다른 일이다. 시간 예술의 근본에는 슬픔이 있다.
-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83-84쪽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다가올 무렵 열린 아홉 번째 텍스트클럽은 공연예술이론가 목정원 님과 함께 했습니다. 아늑한 방처럼 꾸민 무대 위에서 따뜻하고 가만한 목소리로 전한 이야기, 지금은 사라졌지만 분명 존재했던 <목정원의 관객 학교>를 전해드립니다.
아홉 번째 텍스트클럽은 또 한 번 형식과 구성에 실험을 두었습니다. 네 번째 텍스트클럽 <유희경과 밤>에서도 따로 호스트를 두지 않고 작가님 혼자 무대에 올라 시인의 책상에 앉는 연극적인 구성을 빌려왔었습니다. 이번 텍스트클럽도 음악 공연의 형식에 기대어 작가님의 낭독, 이야기에 직접 작사한 노래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오늘 리뷰에서는 아쉽게도 이야기 사이사이 차분히 흘렀던 선율과 목소리까지 담지 못해, 작가님께서 직접 쓰고 다듬은 노랫말을 일부 옮겨둡니다.
노래 #1 "슬픔은 기본값"
기억해요 이 시절을
우리 노래했던 것
가슴 치는 참담이야 잊히지 않아도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은 잊히고 말아요
목정원: 언젠가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때 굉장히 떨게 됐는데요. 긴장되는 순간에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스스로에게 다독이며 하는 이야기는 ‘이거 아주 재밌는 거야. 넌 아주 멋지고, 근사하고, 우리만의 시간이야.’ 다행히 아직 저에게 효험이 있어서 저를 가볍게 해요.
낭독과 노랫말도, 공연이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데, 시간에 기대어서 흘러가잖아요. 여기서 가장 애틋한 지점은, ‘만들어지고 있는 중에 존재한다’는 것 같아요. 잘 만든 다음에 존재할 수 있으면 좀 더 안도감이 들 텐데, 어쩔 수 없이 아주 별로인 모습이라던지, 어떤 균열들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태로 만들어지면서 존재해버릴 수밖에 없고 우리는 다 만들어지면 사라지게 되는 것 같아요. 오늘 이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런 균열과 애틋함을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클럽의 이름 “관객 학교”는 목정원 작가님의 책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 옮겨왔습니다. 관객 학교는 작가님이 오래전에 꾸었던 꿈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목정원: 그런 경우 있잖아요. 난해한 작품을 봤을 때, 나는 뭐가 좋은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브로슈어에 실린 비평 또한 공연을 난해한 말로 옹호하고 있을 때의 그 고독감. 그때 유순하게 꼬리를 내리면서 ‘내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나의 무지를 탓하는 태도를 관객은 대체로 가지고 있고 저는 그것이 아주 슬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비평과 심사의 세계에 있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달라지는 것보다는 관객이 바뀌는 것에 달려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관객 학교를 꿈꿔왔는데요. 지식을 전하거나 정답을 가르치는 장소는 전혀 아니었고요. 아주 다양한 예술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전하고, 다양하게 보고, 어땠냐고 여쭈어보고, 무어라 답하시면 ‘당신이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학교였어요.
노래 #2 "근황"
몸이 자꾸 모자란 기분이 들어요
하루치의 체력이 한 뼘씩 줄어요
노래 #3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나는 슬픈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요
(...)
슬픈 이야기를 해도 돼요
이 세상이 슬프다는 것을 우린 알아요
목정원: 저는 대학에서 미학을 공부했는데요. 그때는 막연하게 무엇이 아름다울까 고민하면서 여러 수업들을 들었어요. 나에게 아름다운 게 뭘까.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춤 영상을 보고 ‘춤추는 사람의 몸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공연예술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춤을 배우기도 하고, 많이 보러 다니고, 축제 같은 데서 자원봉사도 하면서 현장도 구경하고, 그렇게 아주 열렬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절을 보냈는데요. 그러다가 살짝 권태기가 왔어요. 처음에 너무 좋았다고 생각했던 그 작품만큼 좋은 작품이 사실 그렇게 많지는 않고, 아무래도 몸의 언어라는 것이 나에게 아직 너무 어렵다는 막막함을 좀 느끼고 있었어요.
무용축제 자원봉사를 할 때 기획팀이 다 같이 현대 무용 작품을 보러 가게 됐는데, 옆에 계신 팀장님한테 ‘아무래도 너무 어렵고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분이 그때 ‘진짜로 좋은 건 누가 봐도 좋아’라고 말씀하셨어요. 굉장히 큰 후련함을 맛봤습니다. 내가 좋지 않았다면 그 작품이 그 정도로 좋지는 않았구나, 이런 안도감. ‘나도 알아볼 수 있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뭔가 틀릴 것을 염려하지 않고, 진짜로 좋은 건 나한테도 좋겠지, 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방만한 태도로 ‘어디 한번 해봐라’ 이런 건 아니고요. (웃음) ‘잘 바라보면 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죠.
목정원: 20세기 초반의 예술가들, 연극 이론가들은 연극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현실의 문제를 잊지 않고 계속 사유하게 만들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극장을 나서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관객이 되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당시에는 가만히 앉아서 보는 건 수동적이고, 뭔가 행위를 하는 것은 능동적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수동적인 관객을 능동적인 관객으로 바꾸려고 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랑시에르라는 철학자가 볼 때는 ‘과연 가만히 앉아서 보는 게 그만큼 수동적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무지한 스승'의 개념을 예술과 관객에게 가지고 와서 ‘해방된 관객’ 이야기를 합니다. ‘본다’는 일과 연결을 시켜요.
‘본다’는 것은 사실은 제법 적극적인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가만히 앉아서 저를 보고 계시지만, 사실은 제 얘기를 들으면서 엄청 많은 생각들을 하실 수도 있고요. 그렇죠. 우리는 처음부터 그랬어요.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아마 뭔가를 이렇게 열심히 보고, 따라 하기도 하고 혹은 따라 하지 않기로 선택하기도 하면서. 내가 이전까지 봤던 것과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내 안에서 연결시키면서, 그렇게 나무를 만들어가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과 ‘행위한다’는 것, 수동성-능동성의 이분법을 없앨 때 관객에게 해방이 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관객이 자기만이 볼 수 있는 방식대로 무엇이든지 바라보고, 우리는 예술가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관객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의 관객의 이야기를 좀 소개해 드리고 싶었고, 뭔가를 볼 때 늘, 굉장히 적극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공공그라운드 매거진을 꾸준히 읽어오셨다면 텍스트클럽의 묘미를 이미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텍스트클러버의 사연을 미리 받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함께 읽고 공유한 다음, 작가님께서 사연에 대한 코멘트와 직접 준비한 선물을 전해드리는 시간이 있죠.
이번 텍스트클럽에서는 ‘살면서 만난 연극 같은 장면’을 주제로 사연을 모았습니다. 우연히도 ‘할머니'가 등장하는 사연이 여럿 들어와 함께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선물로는 직접 찍은 사진으로 만든 액자와 책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사연 #1
집을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사람은 할머니가 유일했다. 집에서 가장 불안에 떨었을 사람도 할머니가 분명했다. 할머니는 집을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군인들을 향해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사연 #2
할머니와 눈이 마주친 순간 느꼈습니다. 한 이야기가, 한 시절이 그렇게 끝났구나. 우리는 이 순간을 만나기 위해, 저 표정을 보기 위해 몇 달간 달려왔구나. 벅찬 기분이 들었습니다.
목정원: 사라짐의 정조가 두 사연 모두에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첫 번째 사연에서는 할머니가 내가 바라보았던 대상이고, 두 번째 사연에서는 나를 바라본 관객이셨죠. 뭔가 그 둘이 결국 하나인 것 같은 느낌이 묘하게 들더라고요. 그 할머니들에게 어떤 생이 있었고, 그 생을 가지고 어떤 걸 바라봤기 때문에 두 번째 사연 분이 그때 위로를 받은 것이 아닌가 싶었고요.
임흥순 감독님의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라는 다큐 영화가 있는데요. 그 영화에 세 분의 할머니가 나오십니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 제주 4.3 때 항쟁하셨던 분, 그리고 광주에서 빨치산 하셨던 분들이 나오세요. 제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어떤 관객 분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잊힌 역사 속의 여성 운동가들의 모습을 이렇게 목도했는데, 그것이 나에게 지금 힘을 준다기보다 굉장히 허망하고 오히려 슬픈 마음이 든다. 무엇을 나는 할 수 있을까.’
그때 임흥순 감독님께서 답하신 것이 뭐였냐면요. ‘혹시 집에 할머니가 계시다면 한번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세요.’라는 거였어요. 그 작은 것부터 해보자. 왜냐하면 우리들의 할머니 그 세대는 사실 대부분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을 다 통과하셨고, 그러니까 모두의 삶에 그 상흔들이 있을 거라는 거죠. 우리는 그 얘기를 미처 듣지 못하고 그분들을 보내드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들을 들어보면 어떨까,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사건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고, 우리의 삶에 그런 시대가 다 새겨져 있죠. 어쩌면 우리도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지나갔다, 라는 담담함을 가지고 또 다른 청춘을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제주 4.3 때 항쟁하시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생을 마감하신 김동일 선생님의 육성이 나옵니다. 그분의 일본어 억양이 묻은 그 말 자체, 목소리가 무척 힘이 있는데 제가 대신 읽어드릴게요. 인터뷰에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내가 시를 지은 것이 있어. 억울한 죽음을 슬퍼 말라고.
당신네 흘린 피는 이슬이 돼서 영원히 영원히 빛나리로다. (...) 1959미터의 높은, 제일 높은 데 솔나무, 솔나무가 되어 가지고 낙락장송해주시오. (...) 한라산 제일 높은 솔나무가 돼서, 1년간 파리파리한 솔나무가 돼서 낙락장송하시오, 당신네는.”
목정원: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라는 노래는 부를 때 열렬하게, 지금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런 걸 전해드리고 싶었고요. 이어서 노래를 한곡 더 불러드릴 텐데. 이것은 또 태도를 달리해서, 사라지지 말라고 노래하는 것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노래 #6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꽃이 지는 일을 슬퍼말아요
우리는 반드시 헤어지고 말아요
시들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일이에요
영원 속에서라면 사랑하지 않았을 거예요
노래 #7 "생각합니다"
많이 소중해요
깊이 고마워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목정원: ‘삶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는 말을 듣곤 하잖아요. 어빙 고프만이라는 인류학자가 <The presentation of self in everyday life>이라는 책을 썼는데, 우리는 페르소나, 가면을 준비한 다음에 사회생활이라는 무대로 나와서 삶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해요. 저도 오늘은 이런 말투, 표정을 장착하고 여기에 나와 있는데, 살면서 계속 그렇게 바꾸잖아요, 가면을. 누구랑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이 책이 나온 1960-70년대에는 ‘우리의 본질적인 정체성은 없다'는 것이 현대 철학의 기본 기조였기 때문에, 어빙 고프만의 말도 ‘매일 가면을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결국 우리를 구성한다’는 말이 돼요. ‘가면을 다 벗었을 때 진짜 내 얼굴은 없다’는 것이라서, 어떤 면에서는 참 쓸쓸하죠. 그래서 생각을 해봤어요. 가면을 다 벗었을 때의 ‘나’가 만약에, 그래도 있기를 바란다면, 그 존재가 관객은 아닐까. 보는 사람은 아닐까.
셰익스피어 시대에 ‘떼아트럼 문디 Theatrum Mundi’라는 용어가 굉장히 유행을 했는데 ‘떼아트럼’은 극장, ‘문디’는 세상입니다. ‘극장은 곧 세계다.’, ‘인생은 곧 연극이다.’ 이런 내용의 표어였습니다. 그리고 ‘시어터’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의 원형 극장에서 객석을 의미하는 곳이었고, 말 그대로 ‘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떼아트럼 문디’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세계는 보는 곳인가 보다, 싶죠. 그렇게 생각하면 그 근원을 더 따져 묻지 않아도 약간의 안도감이 드는 게 있더라고요.
그리고 이때 본다는 것은, 제가 오늘 노래하는 걸 여러분이 보셨는데요. 노래는 지금 사라졌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안 보셨으면 그 노래가 존재했는지 아닌지 우리는 말할 수 없어지는 지점이 생길 텐데, 여러분이 보셨으니까 그 노래가 ‘있었습니다.’ 본다는 것은 이 세계가 지나가는데, 우리가 그것을 ‘존재하게 만들었다’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말 근원적인 것이기도 하고요.
또 한 가지, 우리는 몸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바라볼 때 상대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 아픔이나 기쁨 같은 것들을 우리는 내 몸에 반사해서 받아들여요. 그려보면서, 따라서 행동하면서 내 안에서 적극적으로 보고 있어서, 누군가의 아픔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떤 소스라침도 같이 감각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본다는 것의 근원에 대해 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우리가 그것을 존재하게 만들고 있으며, 우리는 지금 함께 몸을 가지고 살아있구나. 정말 그런 의미라면 더 많이, 자꾸자꾸 보고, 자꾸 아프고, 그리고 계속 같이 나았으면 좋겠다, 몸을 가지고 오래, 같이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에서도 많은 질문과 답변이 오갔습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텍스트클러버 분들의 질문을, 이야기를 더 듣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본다'와 ‘사라진다'를 깊게 들여다보았던 아홉 번째 텍스트클럽. 현장 질문 중 사라짐과 관련된 질답만 옮겨둡니다.
텍스트클러버: 우리가 인생을 보통 ‘살아간다’고 생각하는데, 오늘 작가님 말씀을 들어보니 ‘우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 같아요. 그것이 그다지 슬프지 않고요. 그런데 ‘사라진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말도 동반되는 것 같아요. 작가님이 생각하시기에 사라짐을 인지하는 것이 더 중요한지, 아니면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한지 궁금합니다.
목정원: 사실 제가 며칠 전에 아주 소중한 친구를 잃었는데요. 영원히 같이 있을 줄 알고 더 보지 못했던 것, 더 하지 못했던 말에 대한 회한을 마음에 품을 수밖에 없잖아요. 자책하게 되고. 근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영원히 있을 줄 알고 사랑하는 것은 뭐가 나쁜가. 사라진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하고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마치 영원할 것처럼, 다음에 또 볼 것처럼, 오늘 이렇게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불러드릴 곡은 "잊고 난 뒤에 다시 만나요" 예요. 오늘 계속 이런 주제가 왔다 갔다 하는 중인데, 제가 우리의 모순됨을 다 드러내고 있죠. (웃음)
오늘을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모든 이야기와 모든 보신 것은 잊혀도 괜찮고요. 아까 제가 그랬죠, 우리가 보는 것이 우리를 구성한다고. 결국 그게 어딘가 내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지 ‘잊으셔도 괜찮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드리면서 오늘 시간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래 #8 "잊고 난 뒤에 다시 만나요"
우리 서로를 잊을 시간이 필요해요
(...)
그 강을 건너고 나면 공허해져요
잊고 난 뒤에 다시 만나요
나는 당신에게 노래를 나누어 준다. 당신은 또 다른 곳으로 가 노래의 일부를 나눠줄 것이다. 목도한 슬픔을 당신의 몸에 기입하며, 당신의 호흡대로 춤추며, 다시 사랑하며. 그렇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되었다가, 마침내 우리가 아닌 것들로 흩어진다. 죽음 이후에는 정말로 영혼만 남게 될까. 그때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서로를 비춰볼 몸이 없어도. 모든 계절을 춤으로 시작할 수 있을까. 춤을 추듯 객석에 앉을 수 있을까. 당신을, 볼 수 있을까.
- 목정원,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172쪽
따뜻하고 단단한 느낌이 묻어나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아름다운 문장으로 먼저 마주한 작가님을 텍스트클럽을 통해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라져 가는 시간의 자리를 지켜보았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영원하지 않더라도, 금방 잊는다고 해도 우리 몸 어딘가에는 나만의 방법으로 보고, 나만의 방법으로 해석한 텍스트클럽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목정원 작가님께서 흔쾌히 응해주신 덕분에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께, 함께 우리의 시간을 만들어주신 텍스트클러버 여러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텍스트클럽은 2022년에도 여러분의 곁에서 새로운 독서의 경험을 제안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기대해주시고 자주 찾아와 주세요. '잊고 난 뒤에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