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클럽 11 <잃지 않아야 할 질문들> 리뷰
"텍스트클럽"은 텍스트를 매개로 텍스트 안팎의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입니다.
텍스트클럽의 관객, ‘텍스트클러버’는 창작물과 창작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창작자의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일방향의 경험이 '읽고 나누는' 쌍방향의 입체적 경험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합니다.
글 | 우주
사진 | 공공그라운드
가슴 아픈 사건이 유독 많은 4월. 슬픔과 고통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김승섭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의 이야기가 담긴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를 바탕으로, 사회적 재난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짚어보았습니다.
이번 텍스트클럽은 김승섭 교수님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듣기 위해, 호스트인 유희경 시인과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두 분의 대화를 최대한 살려 열한 번째 텍스트클럽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유희경 (이하 ‘유'): 제가 처음에 목차를 펼쳤을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평소에 제가 좀 아파서, 슬퍼서, 힘들어서 피했던 이름들을 바로 대해야 했어요. 사실은 이 행사 기획하기 전에 책을 읽지 말아야겠다,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줄이 이렇게 쓰여 있어요. ‘이야기할 수 있다면 슬픔은 견뎌질 수 있다.’ 이 문장을 읽고도 이 책을 안 넘겨볼 수 있는 방법은 저한테 없었습니다. 그렇죠.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계속 피하고, 외면하면, 그러면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절실한 질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승섭 (이하 ‘김’): 이 책 쓰고 처음 만나는 독자 분들이고요.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었는데, 여러분이 앞에 계신 걸 보니 제가 이런 순간들을 기다렸었던 것 같아요. 보고 싶었습니다.
유: 정말 많은 데이터들을 보셔야 하는 연구라 시간이 부족할 텐데, 교수님은 어떻게 여가를 보내실까요. 여가 시간에도 공부하시는 건 아닐 텐데요. (웃음) 지난번에 목공 하는 시간이 많이 의지가 된다고 들었어요.
김: 저는 ‘여가’라는 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초등학교부터 계속 직업이 공부였던 사람이다 보니까. 그리고 공부라는 게 다른 프로젝트처럼 끝난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주말도 가능하면 가족, 아니면 공부로 보냈는데 재작년쯤부터 되게 힘든 일들이 있었거든요. 다들 겪는 그런 일들일 텐데, 저한테도 힘든 일이 왔었고. 못 견디겠더라고요, 스스로가. 내가 그토록 아끼는 딸이나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아주 작은 자극에도 화를 낼 준비가 돼 있었고요.
제가 세월호 생존 학생 연구를 했었을 때, 그 아버님들이 목공을 하시던 게 기억 나서 가까운 목공소에 갔어요. 사장님이 뭘 만들어보고 싶어서 왔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제가 답하기를, ‘저는 사람들과 멀리 있고 싶어요’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딱 보시더니 잘 왔다고, 그런 사람들이 목공 하러 많이 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나무를 만지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뭔가 만지고 있으면 좀 버틸 것 같고. 한 번은 밤 12시 넘었을 때, 마음이 너무 힘든데 나무를 만지면 살 것 같은 거예요. 제가 집 다용도 실에 자잘한 목재를 사뒀는데 그쪽으로 들어가려면 큰 아이 방을 지나가야 돼요. 아이가 저 때문에 깨면 화들짝 놀랄 것 같았는데도 포기를 못하겠는 거예요. 도저히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정말 조심조심 기어가서 나무 좀 만지다가 와서 자고, 그럴 만큼 목공이 저한테는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유: 요즘 어떤 걸 만드세요?
김: 목공을 하니까 좋은 게,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한테 내가 만들어서 뭘 줄 수 있는 거예요. 어려운 건 못 만드는데, 대신에 재료를 좋은 거 쓰면 받았을 때 기분이 나쁘지 않을 만한 무언가는 만들어 줄 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모니터 받침대나 책장 같은 것들 만들고요. 그리고 서울대로 옮기고 나서는 연구실 책상을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그것도 만들어서 쓰고 있어요. 책상 만들 생각 하면 그렇게 좋더라고요.
유: 교수는 공부를 계속해야 되고, 여가 없이 끊임없이 일 생각을 해야 되는 직업이잖아요. 게다가 심지어 다루는 어떤 연구 대상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분들도 결혼 이주 여성이라든가 성소수자라든가,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쌍용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 딱 봐도 너무 아프고, 보고 싶지 않은 그런 대상들을 끊임없이 들여다봐야 되고요. 사실 의대를 나오면 보통 의사라는 길을 택하게 되는데요. 그 길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여건과 편안한 길이었을 수도 있는데 굳이 이 어려운 길을 택하게 된 이야기를 여쭤보고 싶었어요.
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멋진 답을 하면 정말 좋겠는데, 솔직히 말하면 임상 의사로 일하면 얼마만큼 벌 수 있는지를 제가 몰랐던 것 같아요. (웃음). 정말로요. 그런데 그것보다도 돌이켜보면 어떤 큰 문을 열어야겠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가 아니라 저한테 어떤 사건이 왔어요. 사건을 만나서 열심히 하다 보니까 이 경험 때문에 다음 일을 하게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재 노동자 연구를 하다 보니까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트라우마에 대한 연구를 해줄 수 있겠냐는 의뢰가 오고. 트라우마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세월호 참사 관련 연구가 오고. 그다음은 천안함 생존장병으로 이어진 거죠. 제 입장에서는 매번 ‘어떤 선택을 했던가’가 모인 것뿐인데, 밖에서 보면 어떤 의지와 신념이 있어서 커다란 문을 여는 걸로 보이는 것 같아요.
유: 교수님께서 2018년에 천안함 생존장병 실태조사 제안을 받을 무렵에 대해 이렇게 쓰셨어요. ‘도망갈 마땅한 핑계를 찾지 못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핑계를 찾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뭔지 좀 궁금하더라고요. 이 이야기로 오늘 이야기의 시작을 좀 삼아보고 싶었습니다.
김: 세월호 참사 때 몇몇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이 천안함을 저열한 방식으로 이용했잖아요. 근데 막상 가까이서 보면 (천안함 생존장병들은)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견뎌낸 사람들이었거든요. 근데 그들의 고통을 저렇게 값싸게, 저열하게 이용하게 놔두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저는 세월호 연구를 하고 되게 지쳐 있었거든요. 그 당시 세월호 참사 연구는 박근혜 정부가 특조위에서 발주한 건데, 이 연구가 잘 되길 바라지 않았어요. 그리고 참사의 상처 속에서 연구를 하다 보면 정말 아침에 밥 먹다가 우는 상황이 생겨나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어려운 얘기들이 많이 있고…
그런데 제가 그 연구를 잘 해내려고 하면, 그 얘기를 제 안으로 소화를 해야 가능한 거예요. 이야기가 내 안에 충분히 들어와 있지 않으면 내가 하는 말이 붕 떠버려요. 글이 현실로부터 멀어지고, 내 것도 아닌 이상한 말들이 세상에 나오게 돼요. 하지만 이 사건은 그런 류의 언어로 남으면 안 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라, 이야기를 듣고 자꾸 되새김질을 해서 그 상황에 나를 놓으려고 애를 썼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그 연구가 끝나고 스스로는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사실 되게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저뿐만이 아니라 세월호 참사를 취재했던 모든 기자분들이 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쯤에 연락이 온 거예요. 천안함 연구가. 그때 ‘차라리 다른 사람한테 전화를 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요. ‘저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면 그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되는데, 그다음 말이 저한테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판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 같아요.
유: 천안함 사건에 대한 어느 정도 이해가 좀 있으셨나요? 아니면 아예 백지 상태였을까요?
김: 저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게 스스로 무서웠어요. 어떤 말을 하건 힘들 것 같고, 저와 같은 정치적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피해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이 연구를 한다는 건, 제 입장에서는 저를 응원해줬던 사람들과 거리를 둘 수도 있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천안함 사건을 포함해서 많은 재난 사건들이 그렇게 함부로 저열한 방식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고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고, 이 책에 나와있는 수많은 내용 중에 어떤 게 있는지는 몰랐던 것 같아요. 그냥 부딪혔던 것 같고요.
유: 그렇게 해서 연구를 마친 다음에 이것을 어떤 식으로든 갈무리를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셨던 건 생존장병 중 한 분이 ‘연구 자료를 좀 볼 수 있겠느냐,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라고 얘기했을 때라고 하셨죠. 그런데 지금과 같은 ‘책’의 형식으로 펼쳐내어야겠다고 생각하신 까닭이 있을까요? 전작 두 권과 책은 너무 성격이 다른 책이어서 궁금했어요.
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을 쓴 계기는, 실은 천안함보다도 세월호였던 거예요. ‘자료가 필요합니다’고 연락이 왔는데, 그럼 책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나무를 만져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상태였잖아요. 글을 쓴다면 저는 그 세계로 들어가야만 하고, 그렇지 않고서는 좋은 글을 쓸 자신이 없는데, 그 세계에 들어가면 내가 또 다칠 것 같았어요. ‘내가 얼마만큼 아나’, ‘얼마만큼 사람들이 관심이 있을까’ 싶어서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있었던 것 같고요.
그러다가 작년 4월 16일 밤에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요. 세월호 참사 주기가 되면 묘한 느낌이 있잖아요. 그때 딱 어떤 말이 떠오르는 거예요. 오빠가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여동생이 증언대회 같은 걸 하는데, ‘어른들이,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안 해서 저희 오빠가 죽은 거잖아요. 여러분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으면 용기를 내주세요’라고 말했었거든요. 그게 떠올라버리니까, 그때부터 못 도망간 거죠. 원래 이 책을 쓸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출판사에 책을 써야 할 것 같으니 도와달라고 얘기했죠.
유: 얼핏 들었는데, 출판사 직원분들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연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출판사 대표님 집에 모여서 8시간 동안 강연을 하셨대요. 직원 분들 4명을 앞에 두고요.
김: 저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하늘에 있는 누군가가 ‘안 써도 된다’라고 하면 진짜로 안 쓰고 싶었어요. 정말로요. 그래서 그때 강연하면서, ‘내용을 들은 후에 책으로 안 나와도 된다는 판단을 좀 해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내가 인정하고 존경하는, 눈 밝고 기 맑은 사람들한테 확인받고 싶은 욕심, 그리고 책이 많이 팔리고 덜 팔리고와 무관하게 그 사람들이 좋은 글이라고 해주면 좋은 글이라는 확신 같은 게 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을 작업하게 된다면, 출판사 분들이 ‘좋은 글이다. 이 책은 나오는 게 맞다’고 말하면 그때는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유: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천안함과 관련된 책을,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 책이 없었다면 저는 앞으로도 천안함 사건이 화면 조작된 사건이고, 피해자분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본격적인 얘기에 앞서 ‘쓰기’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승섭 선생님의 책은 세 권 다 존칭어로 되어 있어요. 저는 그런 화법이 어쩌면 어려울 수 있는 ‘사회 역학’을 좀 더 대중적으로 풀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이런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어요. 사실은 학자로서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는 일일 수도 있는데 이런 일들을 하고 계세요.
김: 제가 고려대에 재직하던 시절에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쓰고, 학교 시스템에 업적 등록을 했더니 한국어로 된 책을 썼다고 50점이 되더라고요. 제가 국제학술지 논문을 쓰면 하나에 200점, 400점씩 되거든요. <아픔이 길이 되려면> 다음부터 제가 쓴 어떤 책도 학교에 신고하지 않아요. (웃음) 그 책들이 이런 대접을 받게 하기 싫은 거예요. 대학에서는 한국어로 된, 한국사에 대한 책을 쓰는 걸 전혀 인정하진 않아요. 그렇지만 상관없어요. 어차피 대학이라는 공간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인정들 때문에 꼭 해야 하는 일을 안 하기에는, 이 일이 너무 시급하고 저의 한정된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그래서 해야겠어요.
글의 말투나 이런 것들에 대한 고민은, 책의 경쟁자는 유튜브 콘텐츠거든요. 활자가 유튜브 같은 영상 매체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이런 경쟁 상황에서 사회적 상처에 대한 글을, (게다가) 학자가 쓰고 있는 거죠. 조건만 보면 100전 100패의 싸움이죠. 안 읽히는 게 당연하고 놀라울 게 하나도 없는. 그렇지만 저는 할 줄 아는 게 글쓰기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조금이라도 그 문을 열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돼요. 어떤 글을 썼을 때 사람들이 작게라도 마음을 열어주고, 이 글을 읽어줄까.
저는 제 글이 한 호흡에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한 호흡에 쓸 수 있을 만큼 쓰려면, 내가 그 세계에 진짜 들어가 있어서 내 얘기가 되어야 해요. 그렇지만 이 글은 학자의 글이고, 읽었을 때 위안이 되는 면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는 일단 보기 싫은 걸 보게 만드는 글이고. 저는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너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요. 자책감을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말투를 존댓말로 쓰고, 이야기의 입출구를 찾고, 뭐든 해보려고 해요. 그런 긴장 속에서 글을 쓰다 보니까 문체나 이야기 같은 것들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나온 거 아닌가 싶어요.
유: 한편 어떻게 버틸까 싶기는 해요. 세상의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이 전부 이걸 내 안으로 들여서 쓰진 않을 텐데, 이번 책은 유독 그런 게 많이 느껴집니다. 갈등과 고민이요. 첫 번째, 두 번째 책에서는 좀 더 객관적인 이야기를 하셨다면 이번에는 되게 주관적인 부분들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어요.
김: 여러분이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책은 전투용이에요. 이렇게 두고 볼 수 없어서 쓴 책이에요. 물론 말투는 그렇지 않죠. 아무리 마음의 분노가 있고 슬픔이 있어도, 학자의 이름을 달고 글을 쓸 때는 정리해서 소화해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세월호에 대해 함부로 말했던 사람들, 천안함에 대해 함부로 말했던 사람들 그리고 피우진과 변희수에 대해 함부로 말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학자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무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어요.
유: 어떤 쪽에서는 그걸 좀 터부시 하는 경향도 있지 않나요. 학자로서 지나치게 개입한다라든가.
김: 상관없어요. 그러기엔 삶이 너무 짧아요.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유: 저는 그런 맥락에서 읽고 나서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 ‘갈등이 더 많아져야 된다’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리고 책의 결정적인 장면 중에 대한문 옆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위한 빈소와 천안함 용사를 추모하는 빈소 두 개 사이에 폴리스 라인이 깔릴 정도로 첨예하게 갈등이 대립하는 그 장면이,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이라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갈등이 많아져야 된다는 건 어떤 말씀이신지 궁금해요.
김: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혹은 사망자들의 보상금과 세월호 참사 보상금을 비교하면서 욕했던 경우들이 있잖아요. 피해자들을 모욕하던 그 갈등은 무엇도 나아지지 못하게 하는, 서로의 상처를 부추기고 이용할 뿐인 갈등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류의 갈등들은 어떠한 전진도 이끌어낼 수 없어요.
만약에 어떤 사건의 보상금이 다른 보상금 대비 낮다고 생각하면, 합당한 이유를 들어 보상금을 올리기 위한 법안을 제정을 하고, 통과를 시켜야죠. 천안함 생존장병이나 유가족의 보상금이 낮다면, ‘국가를 지키던 군인들이 이렇게 보상받으면 되느냐. 더 받아야 한다'라고 이야기를 해야죠. 그러면 ‘한국적 상황에서 그 돈이 감당 가능한가’ ‘형평성에 맞는가' 등의 질문으로, 논쟁이 벌어질 수 있잖아요. 이건 필요한 갈등이거든요.
중요한 사회적 변화들이 탑다운 방식처럼 윗선에서 결정해서 내려오면, 제도가 혹은 법이 바뀌었다고 그게 지속되는 것 같지 않아요. 삶에는 우리 모두가 각자의 현장에서 끌고 오던 관성과 관습이 있고, 그런 것들이 변화되는 과정은 제도 하나, 법 하나만으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갈등을 겪고 부대끼는 과정 속에서 우리 모두가 나름의 방식으로 학습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변화라고 하는 게 어렵고 귀한 것 같고요.
유: 그러면, 이 책이 싸움이라고 하셨는데 무엇과의 싸움이라고 여쭤봐야 될까요.
김: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과의 싸움. 타인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는 이들과의 싸움. 우리가 당연히 세월호도, 천안함도, 변희수 사건도 깊게 모를 수 있어요. 타인의 삶에 가까이 있는 것도 고통스럽고, 잘 모를 수 있어요. 당연히 어려운 일이고. 그러면 조금 침묵하고 기다릴 수 있잖아요. 판단을 유보하고요. 우리가 그만큼 알지 못하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함부로 말하면서 상대방을 모욕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고, 몇몇 정치인들은 그 저열함에 기대어서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죠.
우리 모두 특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다들 편견이 있단 말이에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요. 하지만 편견과 나의 고집이 있다고 해서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마구마구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타인의 삶에 대해 말할 때 나름의 긴장과 검열과 조심스러움이 있어요. 저는 한국 사회에 그런 조심스러움이 너무 빨리빨리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고요.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거든요, 천안함을 이용해서 세월호를 모욕했던 시간들을. 어쩌다 보니 제가 천안함과 세월호 연구를 다 한 사람이 되어 있잖아요.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세월호 참사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 중에 한 명이긴 하니까, 천안함에 대해 얘기할 때 세월호를 모욕하지 않고도 두 상처를 비교해서 누군가를 덧나게 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다가온 이 두 개의 사건을 이런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것도 내 몫이지 않을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유: 그건 되게 주요했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아니고 김승섭 교수님이 쓰셨다는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물론 쓰신 분께서는 이 책을 끝내고 나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으셨다고 해요.
김: 출판사 분들한테 미안했던 얘기인데 그 책을 쓰는 내내 힘겨웠거든요. 글 쓰는 작업이라는 게 논문하고 달라요. 논문은 정확하게 쓰는 거거든요. 그런데 책은, 특히나 이렇게 문장을 찾고 언어를 길어내야 되는 것들은 나를 그 세계에 깊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있을수록, 최선을 다할수록, 어디가 정상인지 모르는 상황 속에 두어야 해요. 언제 어디서 어떤 언어를 건질 수 있을지 몰라요.
세월호와 천안함, 이 두 사건이 얼마나 예민한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가장 나은 언어를 길러내려고 했고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진심으로 호흡 한 번 하는 것도 책을 위해서 하려고 애를 썼거든요. 숨을 한번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것도요. 그렇게 겨우 겨우 마무리하고 나니까 책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퀄리티나 만듦새에 대한 건 너무 감사한데, 책을 안 열고 싶더라고요. 여러분들은 봐주셔야 되고요. (웃음)
유: 다시 천안함 이야기로 잠깐 돌아가서, 생존 장병 분들하고 많은 대화를 하셨겠죠. 그들이 내심이든 표현으로든 바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스템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거고, 어떤 부분에서는 사회 인식 구조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할 텐데, 그들이 가장 지금 바라는 건 어떤 걸까요?
김: 생존 장병들이 58명이었고 지금 전역한 사람이 34명 정도 되는데, 그들은 다 달라요. 그래서 생존 장병들이 바라는 게 하나라고 말하기는 되게 어려워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요. 모든 참사나 재난이나 상처가 된 사건에서 인간은 원래 고유하거든요. 그래서 고유한 관계와 역사와 상황 속에서 서로 다른 요구 사항과 다른 고민들이 있어요. 근데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정체성을 두고서 그 사람들이 동일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 같아요. 당사자들은 어떨 때는 경제적 보상이 필요하고, 어떨 때는 명예회복이 필요한데, 그건 당사자들의 싸움이기도 했고요. 그래서 이 책이 생존 장병의 싸움을 대신하는 거라면 좋은 책이 될 수가 없어요. 저는 생존 장병이 아니기 때문에요.
이 책은 제 싸움이에요. 그래야 저의 글이거든요. 누군가를 위해서 썼거나 누군가를 대신해서 쓰는 책이 아니고요. 저의 싸움은 세월호, 천안함을 보다 나은 언어 속에서 묘사하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달하고 싶었다는 것이죠. 저는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하는 게 항상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거꾸로 이분들이 스스로 처했던 사건에 대한 충분한 언어를 갖기에는 삶이 너무 바쁜 거예요. 저는 공부하는 사람이니까 제도에 대해 공부하고, 낙인에 대해 공부하고, 참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조건에 있잖아요. 이 사건을 더 나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내 몫이 되겠구나, 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유: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 ‘산업재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머리를 뭘로 딱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들이 군인이고, 생계가 걸려 있는 일들이었고, 자기 미래의 직업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 표현 하나로 정확하게 현실을 와닿게 하는 것 같았거든요.
김: 저는 어떤 예민한 사건을 놓고 사람들이 싸우면,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약자의 편에 설 수 있는 언어의 전선을 찾고 싶어요. 예를 들어 21살, 22살 친구들이 새벽 2시쯤 갑자기 토론에 붙을 수 있잖아요. 그때 할 수 있는 말을 찾고 싶어요. ‘사건의 원인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더라도, 국가를 지키다 다쳤다는 게 맞다면 거기에 대한 합당한 보상은 필요한 거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죠. 여러 논쟁이 오가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을 거고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언어의 전선을 찾는데 관심이 많아요.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맥락에서 ‘산업재해’라는 표현이 유용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리고 산업재해 얘기를 하는 순간부터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보게 되는 게 있어요. 피해자의 몸. 저 사람이 뭘 겪었구나. 천안함은 자꾸 배를 보잖아요. 근데 (산업재해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언어이기도 한 거예요. 이런 게 어떤 렌즈를 통해 그 사건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는 힘인 것 같기도 하고요.
유: ‘피해자의 몸'에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변희수 하사에 대한 이야기도 연결되는데요. 두 분에 대한 연구도 계속 이어가고 계셨던 건지, 아니면 산업재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연관이 돼서 연구를 하시게 된 건지 궁금합니다.
김: 원래 두 분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책의 사건들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국사의 수많은 것들과 얽혀 있는 사건이라는 생각과 고민이 있었어요. 천안함 사건이라는 렌즈, 안경을 통해서 한국 사회를 바라보게 되면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우리가 누구였는지를 더 잘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피우진과 변희수의 이야기, 소방공무원의 이야기, 산업재해 이야기, 세월호 참사 이야기들을 함께 하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고,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가에 대해서 천안함이라고 하는 렌즈를 통해 보길 바랐던 거였고. 그런 맥락에서 그 이야기들을 갖고 오려고 안간힘을 썼던 거죠.
유: 읽으면서 ‘아 이거 내 얘기야’가 되어 버리는 순간이 어느 지점에 딱 찾아왔다고 생각해요.
김: 이 책이 읽은 분들은 너무 좋아해 주시는데, 이 책의 내용을 보고 책 열기를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너무 많아요. 그런데 저는 편안해지는 순간 이 판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이라는 이유로 한쪽을 욕하고 말아 버리면, 그렇게 정리하면 안 되는 거예요.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 나아가는 게 아니에요. 제 생각에는 사람이 나아가는 건, 어떤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갖고 있으니까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
아까 말했던 그런 방식으로 천안함 사건을 정리해버리면 ‘정리’가 돼버려요. 안심이 되고 편안해지거든요. 그럼 이 책은, 이 책의 이야기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질문이 되지 못해요. 그러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걱정되죠. 이 책을 어떤 사람이 읽어줄 것인가, 혹은 이 책을 읽고 나서 남는 이 찜찜함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데 그렇다고 해서 자기만족하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거고요. 그리고 그 긴장을, 그 질문을 잘하는 책으로 써서 우리 모두 시스템의 일부였다는 것,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하지만 미래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유: 네,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내 얘기’라는 건 생각하고 볼 수 있게 됐다는 거거든요. ‘안 보면 그만이지’ ‘이 책 덮으면 그만이지’에서 덮을 수 없는 이야기가 돼버린 거죠.
유: <미래의 피해자들 이겼다>. 제목이 아주 훌륭하게 잘 뽑혔다고 생각해요. 어떠세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고 싶은 게, 믿고 싶어 하는 게 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우리가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왠지 우리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인 건지 실제로 조금조금씩 나아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김: 만약에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게 100인데 5 밖에 못 왔어요. 그럼 95가 너무 멀잖아요. 95만큼 남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5만큼 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세상에서 나아가는 건 항상 힘겹기 때문에. 우리가 이루어낸 작은 성과들, 힘겹지만 겨우겨우 버텨낸 무언가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우린 내내 져요. 내내 초라해지고, 내내 지쳐요.
또 하나, 저는 아주 역사의 특별한 순간을 빼놓고는 객관적인 조건이나 정세에서 희망이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희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처음부터 정세나 조건에서 나온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요. 희망은 어떤 에너지이고 의지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다 열심히 해봤는데 희망이 없고, 지쳤고 바뀌지 않았을 때 ‘세상에 희망이 없어’라고 말할게 아니라 ‘나는 지쳤어’라고 해야 되는 것 같고. 그러면 이다음에, 아직 그 에너지가 남아있고 아직 그만큼의 좌절을 겪지 않은 다음 세대가 바통을 이어받아서 또 다른 싸움을 해줄 거라고 믿거든요.
희망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실은 그런 의미로 있다는 거. 그런 맥락에서 미래의 피해자들은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서 이기는 것들이 아니라, 그 싸움을 함께했던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서, 그리고 이 시간을 견뎌내준 피해자 분들로 인해서 (이기게 될 거고).
그리고 이 피해자분들이 자신의 고통을 보상받고, 위로받고 싶은 것도 물론 없지 않았지만, 그들이 항상 했던 생각은 ‘이걸 다음 세대에, 이다음에 누가 또 겪으면 안 된다’는 마음들이 있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바라봐주는 것, 그리고 그런 언어로 그 사건을 보려고 우리가 애써주는 것이 그 시간을 견뎌내준 사람에 대한 가장 나은 형태의 예의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김승섭 교수님께서 텍스트클러버를 위해 준비해주신 선물은 제주도에서 직접 찍은 사진 액자였습니다. 교수님께서 너무 지칠 때 이 사진을 보게 된다고 하셨는데요. 제주도에 잠시 머물 때, 해가 질 때마다 바다를 바라보다가 찍어둔 사진이라고 합니다.
김: 사진 맨 뒤에 보면 작은 불빛들이 한치잡이 배들이거든요. 배, 바다와 하늘이 예쁘게 있어서 빨리 사진 찍어두고, 사진이 너무 좋아서 크게 확대해서 연구실에 걸어놓고 가끔 숨이 막힐 때면 제주도에서 창가를 보고 있었던 걸 생각해요. 많이 지치는 것만큼 무언가 나를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 사소한 것들이 필요해요.
현장의 질문과 의견은 아래 문답 형식으로 남깁니다.
텍스트클러버 1: 이 책을 읽으면서 천안함 생존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모습을 많이 강조하시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세월호 사건이 좀 더 괜찮았다, 라는 비교가 어떤 사람들한테는 조금 불편할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두 사건을 모두 연구를 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명확한 의도가 있으셨을 텐데, 의도가 궁금했습니다.
김: 저는 아픔의 크기를 비교하는 건 되게 어리석은 화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회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그 상처를 보듬으면서 연대하는 사람들은 진보에 속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요. 천안함, 세월호 참사 사건에서 그 참사의 고통스러움과 비참함 만큼이나 돋보였던 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함께 슬퍼하고, 그 자리로 달려가서 같이 했던 면이었고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 면만 바라본다고 하면 저는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더 외로웠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정말 아무도 없었어요. 놀라울 만큼 아무도 없었어요.
군대 안에서 이들은 참사 직후에도 패잔병이었던 거예요. 그런 얘기를 동료들이 서슴없이 했고. 직업군인을 꿈꾸고 있었는데 ‘너랑 같은 배 타면 배 가라앉으니까, 재수 없으니까 오지 말라’고 하는 말을 들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 천안함 함장님의 나이가 지금 제 나이거든요. 함장님은 평생 군인으로 살겠다고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인데 '네가 살아있어서 생존장병들이 보상 못 받는다’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계속 들었어요. 그게 참사 터지고 1년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이 견뎠던 시간이에요.
저는 언어를 통해서 되는 ‘이해’가 사실은 우리의 감정에 가닿는 공감의 크기를 넘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말을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면 안 듣게 되잖아요. 그거랑 같은 건데. 마음을 내어준 만큼 옳고 그름과 상관없이 다가올 수 있는 면이 있거든요. 근데 저는 생존 장병들은 가까이서 보면 정말 외로웠고 억울했었다고 생각하고요.
가장 속상했던 건 이들이 직업군인을 생각했던 사람들이라 엄격한 훈련을 받아서, 세상을 잘 원망하지 못해요. 그냥 욕이나 한번 시원하게 하면 좋겠는데, 그 와중에 ‘이해는 하지만’ ‘이기적이지만' 이런 말들을 자꾸 하는 거예요. 속상하더라고요. 저는 이 책에서 두 사건을 같이 얘기하는 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나 생존 학생들의 삶을 폄하하는 일은 아닐 거였다고 생각하고요. 동시에 둘 다 서해 바다에서 배가 침몰해서 동료들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리고 대부분은 진짜 어렸어요. 직업군인인데 25살 미만이었어요.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런 생각도 한번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런데 사실 저도 두려웠어요. 그 글 쓰면서 무섭더라고요. 세월호라고 하는 사건은 제가 대중 강연을 안 다녔던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거든요. 그 시간을 얘기하면 제가 무대에서 우는 게 스스로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두 사건을 얘기하는 나 자신을 내가 감당하는 것도 저에게는 큰 일이었던 것 같아요.
유: 생각해 보니까,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인데 세월호 생존 학생들하고 천안한 병사들하고 나이 차이가 얼마 안 나요. 되게 충격적이더라고요. 군인이라는 이름만으로 다 견딜 수 있나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텍스트클러버 2: 저를 괴롭게 사로잡고 있던 질문은 ‘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에 이렇게 무감각할까’에요. 이런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제 주변 사람들이 미워지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 스스로에게도 ‘왜 나는 색안경을 끼고 천안함 생존 장병들을 바라봤나' 싶어서 저 스스로에 대한 분노 혹은 실망 같은 것들로도 이어지게 됐는데요. 책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람들은 피해자가 싫은 게 아니라, 그 피해자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한국 사회가 싫었던 것이다’라는 대목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책에 담지 않은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고요.
김: 이 책을 쓰고 너무 힘들었다고 하니까, 출판사 대표님이 저한테 ‘이 책의 이야기는 교수님한테 당도했던 거고 이걸 풀어내지 않으시면 다음으로 못 나가셨을 거다’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웃음) 왜냐하면 인간은 타인의 고통은 잊어요. 타인의 고통에 인간은 둔감해요. 아무리 제가 세월호 참사, 천안함 생존 장병들의 고통에 시간과 마음을 냈을지언정, 내 고통이 아닌 건 내 고통이 아닌 거예요.
어떤 얘기냐면요. 바로 옆에 유 시인님이 계시지만 시인님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도 저는 모르잖아요. 시인님이 정말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해서 제가 알지 않는다는 거죠. 고통이라고 하는 건 기본적으로 개인의 것이고, 개인의 고통은 전달이 되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 모두가 외롭고 힘든 면이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타인의 고통에 무심하다는 것이 실제로는 그렇게 놀랍지 않은 일이라는 걸 먼저 전제로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꾸 실망하게 되고 세상을 경멸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한 개인의 몸 안에 있는 고통의 이야기, 슬픔이라고 하는 것들이 사회적 고통이 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되는 지점이 무엇인가. 저는 그 고통에 대해 누군가가 응답하기 시작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 응답을 잘 해낼수록,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그 고통이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그 고통을 공유하는 과정이 비참함의 언어로, 슬픔의 언어로만 전달되면 다들 너무 빨리 지쳐요. 슬픈 이야기니까 슬픔의 언어도 견뎌야한다고 하는 것도 때로는 과도한 요구예요. 사람들은 공감하지만 희망을 보고 싶어하고, 이 사건을 통해 나아가고 있는 걸 보고싶어 하는 마음들이 있거든요. 물론 계속 나아가지 못하고 비참한 상황만의 연속인 경우도 있고, 그럴 때는 정직하게 비참하게 절망하는 게 답이겠죠. 그렇지만 작게라도 나아가는 면들이 있다면, 우리가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100까지 가려고 하지만 5만큼 왔을 때 5만큼에 대해서도 의미 부여를 하고, 인정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들 역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텍스트클러버 3: 저는 책을 한 번에 쭉 완독을 했는데요. 처음에 책을 딱 펼치고 첫 문장만 읽었는데, 되게 부담감 없이 같이 이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다 싶어서 굉장히 좋았고요. 교수님이 거리감을 잘 유지하면서 객관적이게 쓰셨고,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부분들을 잘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자신의 피해자성은 어느 지점에 있는지, 그래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어떻게 구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김: 이런 사건에 덤벼들 수 있는 건 저한테 공부라고 하는 무기가 있어서예요. 저는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가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수많은 희로애락과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 기록해 놓고, 표현하려고 애썼던 역사들 속에서 저는 아주 일부분이지만 읽고 습득해서 빚진 상태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고요.
항상 생각하는 건데 예민한 사건들에 대해 글을 쓸 때는 내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고 내 몸을 거기에 던져놓는 씨줄, 계속 공부를 하면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날줄을 가지고 이 둘이 만나는 지점을 계속 찾는 거거든요. 만나는 지점을 넓히려고 계속 애를 써서 여기에 한정해서 글을 쓰려고 해요. 공부만 되고 마음이 안 나가는 데서 글을 쓰면 글이 딱딱해지고, 논리적이긴 한데 다가갈 수 없고요. 학술적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는데 감정적인 것을 쓰게 되면 투정을 부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교집합을 찾는 게 내내 어려운 지점이에요. 스스로를 생각할 때는, 나의 감정과 나의 관계 속에서 계속 출렁이듯이 헤매면서 버티는 것 같아요.
텍스트클러버 4: 교수님은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랑 계속 대화를 하시잖아요. 그 사람들이 낯선 사람, 특히 학자한테 마음을 여는 게 참 쉽지가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 그 사람들 마음에 가닿으시려고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김: 실제로 안 열어줘요. 지금도 기억하는데 세월호 생존 학생 연구를 하게 돼서 책임 연구자로 생존 학생들 부모 모임에 갔는데, 행정학과 교수님이랑 같이 갔었거든요. 앞에 앉아있는데 5분 동안 눈을 안 마주쳐주는 거예요. 인사하고 앉았는데도요. 이해는 하죠. 세월호 참사에서 정부가 했던 역할이 있고, 그 정부의 용역과제 책임자가 사고 터진 지 1년 반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무슨 연구를 하겠다고 나타났나.
그때 그 시선을 견디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저 사람들을 원망하면 안 된다’, ‘저건 합당한 감정이다’, ‘나라도 그렇겠다’는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고요. 많은 소수자 연구가 실은 다 그래요. 그분들이 보기에는 저 사람은 나와 같은 소수자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여기에 왔나, 그런 긴장들이 있고. 그럴 때 그걸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려고 해요. 당연히 사람이면 저렇게 생각하는 게 맞지. 그리고 거의 모든 경우에 깊게 들어가는 데 실패해요.
그러다 간혹 몇몇 사람들과 길게 관계가 맺어지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제가 친하게 지내는 트랜스젠더 활동가가 있는데, 트랜스젠더 관련돼서 어려운 얘기들, 힘든 얘기들이 나오면 그 친구랑은 대화를 할 수 있어요. 내가 이런 게 어려운데 이렇게 생각하면 되냐, 이런 말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떠냐. 이건 몇 년 동안에 계속 쌓였던 신뢰 때문에 가능한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정답이 있는 것 같진 않고요.
가끔은 그렇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할 때가 있어요. 이렇게 감정적으로 소진되기도 하고, 논문 쓰는 학자인데 싶어서 어렵기도 하죠. 그래도 그런 과정들이 주는 가슴 떨림과 설렘,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면들이 가끔 있어서 이렇게 연구하는 것 같아요.
유: 교수님은 대체적으로 프레젠테이션 강연을 하시는데, 이렇게 말로 풀어내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어요. 오늘 어떠셨나요.
김: 이렇게 만나 뵙는 거 너무 좋거든요. 제가 소심한 사람이어서 그런지 제 책을 읽고 좋아해 주는 분을 만나면 이게 너무 좋은데 무서워요. 제가 하는 연구를 잘하려면, 지리한 논문 읽기와 계속 실패하는 관계 맺기 속에서 익숙해져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저는 제 책을 따뜻하게 읽어주는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따뜻하고 힘을 얻기도 하지만 동시에 좋은 연구자가 되려고 하면 나의 어떤 결 같은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사실 이런 자리가 몇 년 만이거든요. 무대 올라오기 전에 스스로 한번 했던 결심이 있는데요. ‘가드를 내리고 시작해보자’. 이 좋은 금요일 밤에, 심지어 이 주제로 이 책으로 만나는 분들이라서 얘기하는 내내 거짓말을 하지 않아 보려고 애썼고요.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실은 이런 자리가 그리웠었나 봐요. 좋네요.
유: 저는 이 책 32페이지에 있는 생존장병의 에피소드가 인상 깊었었는데, 지인들에게 본인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줬더니 우울해지는 걸 보면서 ‘아 이제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이 증언이, 이 얘기가 저를 되게 울렸어요. 함께 산다는 게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있게 하고, 그걸 기꺼이 들어주는 것.
저한테 능숙하게 그런 것들을 위로하고 모색할 능력은 없지만 그것만큼은 잊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이 책을 읽고 나서 제가 얻은 교훈이고, 최근에 읽었었던 그 어떤 시집이나 어떤 작업보다도 더 저한테 울림이 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앞쪽에 둔 스툴 두 개. 비워둔 하나는 우리 옆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전보다 더 나아진 것은 무엇이고, 지금은 어디까지 왔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서로의 어깨를 빌려주고, 빌려가며 ‘이야기'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