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상대를 인정하는 마음
어제 병원을 다녀왔다. 목이 부어서 간 것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감자나 고구마가 걸린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나는 침을 삼키면 목이 부어서 아픈데 이게 감자나 고구마 정도의 아픔인 건지 분간이 안됐다. 고구마를 어슷썰기 했다고 치면 2-3개가 낀 느낌이고 깍둑썰기라면 그 정도가 걸린 느낌은 아니었다.
‘혹시 그 고구마랑 감자 크기가 어떻게 돼요?’
순간 이렇게 묻고 싶었다. 사회생활 눈치 상 그 질문이 적합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물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침을 삼키면 목이 아파요.”
“아니, 그러니까 목이 부었으니까 삼킬 땐 아픈 게 당연하고. 감자나 고구마가 걸린 묵직한 느낌이 드시냐고요.”
나는 이해 잘 안 됐다. 묵직함이 있으니까 목이 아픈 거 아닌가? 그러면 고구마나 감자가 한 입 베어 문 것을 말하는 건지 혹시 어슷 썰기인지 깍둑썰기인지 몇 cm로 잘랐고 조각은 몇 개인지 너무 복잡해지는 거였다.
“아… 모르겠어요.”
“혹시 코로나일 수도 있으니 코랑 목은 못 봐드려요. 주사 맞고 가세요. 약도 드릴게요. 상태 보고 또 오세요.”
상황은 의사 선생님 덕에 마무리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막내 동생에게 물어봤다. 초등학생 오 학년인 동생에게 이 상황을 말하다가 질문이 더 추가됐다.
“봐봐. 감자랑 고구마가 목에 걸린 느낌이길 설명하기 전에 그게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썰기는 무슨 썰기인지 궁금하지 않아? 게다가 감자는 외국산인지 국내산인지에 따라서 전분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데!”
“언니. 지금 감자랑 고구마인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한테 의사 선생님처럼 물어봐봐. 내가 답해볼게.”
“자, 환자분. 목이 부으셨어요? 침을 삼킬 때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게 걸린 느낌인가요?”
“아니요. 이물감은 없고요. 침 삼킬 때 아픈 정도요.”
“아~~ 이물감을 물어보는 거였어? 그럼 나도 이물감이 있는 정도는 아니지.”
“답답하다 진짜… 그게 고구마랑 감자가 된 거지. 비유야 비유. 채소가 될 수도 있고 다른 게 될 수도 있지.”
“그럼 파프리카 같은 걸로 바뀔 수도 있어?”
“어.”
“근데 그러면 그걸 반으로 가를 때 위에서 자른 건지 옆에서 자른 건지에 따라 크기가 또 달라지고…”
“언니. 그만 해.”
나는 엄마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가 똑같은 상황을 말해줬다. 엄마도 의사 선생님의 비유가 더 확실했으면 네가 안 헷갈렸겠다고, 포도 한 알이라고 했으면 좋았겠네 라고 했다.
“맞아! 포도 한 알! 그게 내가 원하던 거잖아. 적당한 크기가 연상되면서 개수도 확실한 거!”
나는 그게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다. 확실한 기준이 될만한 조건 말이다. 감자나 고구마는 나에게 너무 많은 선택 조건이었다.
옛날에 나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때 나 자신을 자주 책망하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바보 같고, 느려 보여도 이런 생각들은 늘 나를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마케터라는 직업을 하다가 새로운 적성을 찾아 지금은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이러한 발전들은 내가 다양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시각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길러준다. 내가 무엇이 중요한 사람인지를 알고 난 뒤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인정하는 법도 배웠다.
그런데 오늘 눈을 뜨고 다시 난 이런 생각에 빠졌다.
‘사파이어 포도는 길쭉하게 생겼고 샤인 머스켓은 일반 청포도보다 약간 크고 국내산 포도는 수입산보다 약간 작지만 아주 동그랗고… 게다가 껍질을 깐 포도인지 안 깐 포도인지에 따라 미끄러움이 달라지는데. 엄마는 도대체 어떤 포도를 떠올린 걸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