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붐 May 14. 2020

#3 산티아고 순례길-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순례길을 걸으며 처음 만나는 대도시, 팜플로나

순례길 3일 차,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우비를 입고 길을 나선다.

오늘은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게 되는 첫 번째 큰 도시에 가는 날이다.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 등 대도시답게 가볼만한 곳들이 곳곳에 있다. 곧 만나게 될 도시를 기대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길을 만나게 된다. 도로를 걸을 때도 있고 으슥한 산길을 걸을 때도 있다. 이런 으슥한 산길을 걸을 때면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 다시 가방에 넣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걷는다. 아마 앞에 걷고 있는 수언니가 없었다면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대낮임에도 울창한 숲길의 분위기는 스산했다. 저 멀리 앞에서 걷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이 안 보이면 속도를 조금 높여 언니의 뒤를 열심히 따랐고 언니의 뒷모습이 나타나면 안심하고 내 페이스대로 걷기를 반복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다양한 외국 순례자들에게 순례길에 관한 여러 이야기 들을 듣는데 그중 하나 성범죄였다. 많은 여성들이 순례길에서 성범죄의 타깃이 되며 생각보다 그 피해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순례길의 방향을 자기 집 쪽으로 돌려놓은 범죄자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뉴스 기사를 본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외국인 순례자가 말해준 이야기이기 때문에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를 듣고 더욱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순례길을 걷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동행이 있되 순례길을 걸을 땐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길 바랬다. 30일간의 긴 여정을 나 홀로 걷는다면 너무나 외로울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동행이 있길 바랬다(안전상의 문제도 있었다). 중간중간 동행자와 대화를 하며 현재 나의 감정들을 나눌 때, 그것이 배가 됨을 자주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저녁을 함께 먹을 동료도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수언니와 나는 너무나 잘 맞았다. 항상 출발은 같이하며 짧은 스몰토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떨어져 각자 생각에 잠겨 순례길을 걸었다. 하지만 서로의 안전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만큼의 거리 정도만 떨어져 걸었다. 그리고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함께 저녁을 먹고 그날 느낀 감정, 생각들을 서로 나누며 힘들 수도 있는 순례길을 서로 의지하고 응원하며 30일을 걸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둘 다 와인과 맥주를 매우 좋아한다. 순례길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언니와 함께 기울이는 한잔의 술은 순례길에서의 느낀 작지만 큰 기쁨이기도 했다.


오늘도 서로가 서로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만 떨어져 걷고 있었다. 스산한 숲길을 벗어나 마을과 마을을 지나는 큰길을 걷는데 잠시 멈추었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갑자기 엄청난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일단 건물의 지붕 밑으로 들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우리의 목적지까진 약 3시간 정도를 더 걸어야 했다.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우비가 엄청난 방수력을 갖고 있길 바라며 그 장대비를 맞으며 목적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순례자들의 표지판 역할을 하는 돌기둥의 화살표마저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인해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언니와 나는 핸드폰을 꺼내 지도를 보며 한 발 한 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초겨울의 날씨에 오랜 시간 비를 맞고 걸으니 몸이 덜덜 떨렸다. 우비를 입었지만 신발과 하의는 모두 젖고 꼭 물에 빠진 생쥐꼴이었다. 그때부터 무슨 정신으로 목적지까지 걸었는지 모르겠다. 비에 핸드폰이 젖는지도 모르고 손에 핸드폰을 쥐고(빗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다음날까지 핸드폰은 켜지지 않았다) 추위에 벌벌 떨며 하염없이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길을 걷는 중에 우리처럼 길을 잃은 미국인 순례자 한 명을 만났는데 그는 얼빠진 내 얼굴을 보더니 괜찮냐며 나를 걱정해주었고 목적지까지 함께하며 계속해서 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수언니와 나 그리고 미국인 순례자는 드디어 팜플로나의 알베르게에 도착하였다.


우비를 입었음에도 빗물이 들어와 온몸이 잔뜩 젖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도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서둘러 순례자 여권을 꺼내 알베르게 도장을 받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바로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를 하러 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이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지금까지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았음에도 그렇게 오랫동안 비를 맞은 적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초겨울의 날씨에 말이다. '정말 개고생을 사서 하네.. 하하'라는 생각과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푹신한 침대 위 침낭에 쏙 들어가 있으니 '이곳이 천국이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근처 중국인 마트에 갔다. 그곳에서 신라면을 판다는 고급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초겨울의 날씨에 비를 맞고 벌벌 떨었더니 얼큰하고 뜨끈한 국물이 너무나 간절했다. 물어물어 무사히 중국인 마트에 도착했고 나는 오늘 먹을 신라면 한 봉지와 한식이 사무치게 그리울 훗날을 위해 한 봉지를 더 쟁였다. 딴 길로 새지 않고 곧장 알베르게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먹었다.


누구에게나 인생라면이 있을 것이다. 수영장에서 수영 후 먹는 육개장 혹은 엠티 다음날 해장라면 등.

나에겐 바로 오늘 이 라면이 인생라면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신라면의 깊은 조미료 맛.

오늘 하루의 고생을 다 잊게 해 주는 맛이다. 라면을 먹고 잠시 소화가 되길 기다렸다가 우린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가 사랑한 레스토랑을 방문했다. 고급스러운 외관이었고 내부도 굉장히 넓었다. 수언니와 나는 각각 스테이크 코스요리를 시켰다. 스테이크는 너무 질기고 생각보다 맛있진 않았다. 오죽하면 그날 먹은 코스요리 중 가장 맛있었던 게 구운 대파였다.


와인과 이게 고무인지 고기인지 모를 스테이크를 먹으며 수언니와 함께 한창 담소를 나눌 때쯤 순례길을 걸으며 간단한 인사말 정도만 나눈 이탈리아에서 온 p와 캐나다(정확하진 않다)에서 온 중년의 여성이 같이 앉아도 될지 물어봤다. 우린 흔쾌히 'yes'를 외치며 그 둘과 남은 식사를 함께했다. 캐나다에서 온 M(정확한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아 편의상 M이라 하겠다)은 본인이 암을 앓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변화가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비록 짧은 영어실력으로 인해 그녀의 깊은 사연을 다 알진 못하였지만 그녀가 완쾌 후 건강한 모습으로 이 순례길을 걷는 행복은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연을 가진 순례자들을 많이 만난다. 이러한 즐거움 역시 순례길을 걸으며 만나는 기쁨 중 하나이다. 그들로 인해 보잘것없다 여겼던 내가 가진 것이 갑자기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그들의 긍정적인 삶의 방식을 간접적으로 접하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M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6일 동안 무사히 순례길을 걷고 있음에 감사하며 순례길의 6번째 밤을 마무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 산티아고 순례길-불편하지만 꼭 말해야 하는 진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