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매개로
그림은 두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던 건 유럽 여행을 하면서다.
그리 길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그래도 방문하는 도시에 있는 유명한 박물관과 미술관을 집중적으로 둘러보았다. 기억에 남는 곳들이 몇몇 곳 있지만 그중에서도 시스티나 성당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처음 봤다. 천지창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도 천지창조를 직접 봤을 때의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니 영상을 통해서 사진을 통해서 숱하게 봐왔던 작품이지만 현장에서 접하게 된 천지창조의 느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림 속 인물들이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튀어나올 듯했다. 생동감이 넘쳤고, 아니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그림의 스케일과 표현에 압도당했다. 정말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내 목을 치켜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림을 뚫어져라 봤다. 찬찬히 그 순간을 음미했다. 그림은 직접 봤을 때 그 고유의 분위기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한 사람이 다 완성했을까. 통증을 견뎌가며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가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다. ' 생각하며 인류의 걸작을 보는 영광을 누렸다. 깊은 감동이 밀려들었는데 그 여파와 잔상이 꽤나 오랜 시간 갔다.
그런 강렬한 기억 때문인지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 종종 미술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소소한 취미가 생겼다. 미술에 대한 기본 지식과 견해가 있다면 훨씬 풍요롭고 다채롭게 그림을 볼 수 있겠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또 그 그림을 그려낸 작가에 대해 내 나름으로 이해해 보는 것만으로도 삶에 좋은 영감을 준다.
최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미셸 들라크루아전을 다녀왔다. 프랑스 화가 미셸 들라크루아는 프랑스 파리의 풍경을 동화처럼 그려내는 작가다. 솔직히 말하면 근처를 지나가는 길에 우연찮게 전시회를 하고 있단 걸 알게 됐고 정말 별다른 기대감 없이 전시를 보러 갔다. 처음 전시회를 보고자 한 동기의 8할은 파리의 모습이 그림의 주제라는 점 때문이었다. 별다른 기대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제대로 그림을 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생각이 싹 바뀌었다. 취향저격을 제대로 당해서 '좋다. 좋다'를 연발하면서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그림들은 어찌 보면 같은 느낌이라고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림 하나하나가 주는 느낌들이 다 달라서 전혀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똑같은 장소를 그린 그림이더라도 낮 시간을 표현한 것인지 밤 시간을 표현한 것인지 아침인지 아침이라면 언제쯤 아침일지 계절이 봄인지 여름인지 가을인지 겨울인지에 따라서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표현들이 마치 내가 1930년대 파리 거리 한복판에 서서 이 장면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파리 거리 속에서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바뀌는 것을 고스란히 느꼈고 그 거리 속 냄새, 공기의 온도마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점점이 그냥 쓱 대충 그려 찍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한 디테일을 가지고 있는 그림 표현이 가슴을 간질였고 특히 빛의 표현이 정말 좋았다. 모든 그림들이 좋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심장을 한 대 얻어맞은 듯이 '헉'하고 서 있었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빛 표현이 유달리 좋았던 작품들이었다. 달빛 표현, 차량 전조등 표현, 가로등 불빛, 상점을 통해 나오는 불빛. 분명 아기자기한 동화 속 세계 같지만 실제 같았다. 색색 불을 밝힌 상점들, 거리에서 마차를 타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아이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어머니의 모습까지.
파리 토박이인 들라크루아는 호불호가 없는 화가로 유명한데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거느렸다. 그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50여 년간 '파리의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파리에서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던 전성기 시절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인 1933년 출생했다. 그 시절은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들라크루아는 파블로와 피카소를 비롯한 전설적인 화가들이 파리의 아름다운 길거리를 거니는 광경이 자신을 그림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화사한 색채와 정교한 붓질로 작가가 그려낸 아기자기한 파리의 일상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들라크루아의 나이는 90세다. 작가가 그려내는 최근 작품들은 10년 전, 20년 전 작품과 비교해 봐도 전혀 그 디테일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을 보면서 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필시 행복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을 많이 했다. 작품 활동을 할 때 행복하다는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행복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작품 활동을 했고 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알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작가의 감정이 그림을 통해서 나에게 전해지는 것만 같다. 그림을 그리며 행복한 작가가 있고 그 그림을 보며 행복한 사람이 있다.
나이가 들어 90세가 된다면 그때 내 모습을 어떤 모습일까? 내 노년의 모습이 어떨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