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남을 비난하는 마음은, 안녕!
모든 것이 낯설었다. 살갗에 닿는 공기마저도.
낯선 학교, 낯선 사람들 결정적으로 낯선 언어까지.
배운 적이 있다곤 하지만 인사와 필수적인 말 몇 마디 할 수 있는 어설픈 수준이었다.
중국에 교환학생으로 막 도착해 1년 간 살아야 할 기숙사에 발을 들였을 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설레는 마음과 더불어 빨리 내가 처한 상황에서 안정을 찾고 싶은 마음에 함께 간 동기와 기숙사와 학교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캡모자를 눌러쓴 티셔츠 차림의 남자가 지나가는데 '한국인이다!' 하는 예감이 스쳤다.
정보가 간절했던 나는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인이세요?"하고 그 사람을 불러 세웠다.
예상대로 그는 나와 같은 교환학생이었고 같은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같은 교환학생의 처지로 초기 정착에 필요한 유용한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만남이 계기가 되어 가끔 다른 이들과 어울려 맥주 한 잔 하는 사이가 됐다.
하루는 그가 여자친구와의 기념일 선물을 봐달라면 목걸이 하나를 꺼냈다.
"여자친구 선물로 샀는데 어때?"
기대에 찬 눈으로 대답을 기다리는데 차마 예쁘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하얀 거짓말을 하지 못한 나는 "음...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라는 직구를 날렸다.
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지만 애써 내 말을 포장하진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후 그를 통해 알게 되는 사람들에게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첨엔 내가 예민한 건가 했는데 분명 처음 만나는데도 나를 다 알 것 같다는 듯 말하거나 행동을 한다든지 내 친구들에게 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와 반응으로 나를 대한다든지 찝찝한 부분들이 반복됐다. 상황은 불편했지만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황이니 이상하다고 생각만 할 뿐이었다. 나만 느낀 건 아니어서 친구들도 왜 저러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내 험담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얘기 들었던 것과는 다른 것 같다며 누군가 귀띔해 줬기에 알게 됐다. 그제야 그간 있었던 상황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낯선 곳에서 이유 없이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던 일은 정말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 경험 이후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기분에 휘둘려 다른 사람 험담은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러나 험담은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던가.
"자! 지금부터는 다른 사람 이야기는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하지 않기예요~~!"
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게 아니었다.
정신 똑띠 차리지 않으면 금방 놓치고 "있잖아"하면서 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얘기했다가 이제 살펴야지 했다가 다시 얘기했다가 하는 것의 반복.
"자기는 맨날 시간 딱 맞춰오잖아"
반복적으로 듣는 얘기였다. 어떨 때 저 말이 노골적으로 비꼬는 것으로 들려서 신경을 긁었다.
말의 핵심은 내가 시간을 딱 맞춰오는 것이 문제라는 것.
처음 시간 딱 맞춰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겼는데 상대가 같은 지적을 때마다 반복했다. 같은 말이 여러 차례 반복되니 듣기 싫은 마음이 커졌다.
'시간을 딱 맞춰오는 것이 왜 문제인가?', '지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을 맞춰서 가는데 왜 시간을 맞춰서 간다고 욕을 먹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짜증이 훅 올라와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 불쾌한 감정에 대해서 하소연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다. 그 사람이 틀렸고 나는 맞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지지받고 싶었다. 본능적으로 아마도 나와 비슷하게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만한 사람, 내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줄 사람을 찾아서 "왜 저러는 거야"하면서 말을 늘어놨다.
쏟아내고 나니 당장 속이 시원했지만 내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은 찝찝함이 남았다.
매번 시간 맞춰서 온다고 나에게 핀잔을 줬던 사람과 가까이서 프로젝트를 함께 할 일이 있었다. 가까이서 살펴본 그는 약속 시간이 30분이라면 20분부터 이미 준비를 마치고 그 장소에 나가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10-15분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의문이 풀렸다. 최소 10분은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보기에는 시간을 딱 맞춰 등장하는 내가 얄밉게 보이기도 했을 터였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내가 이해 안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린 서로 몸에 익은 삶의 습관과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었다.
험담을 쏟아내고 난 뒤 내가 내 얼굴에 침 뱉은 것 같은 찝찝함은 아마도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험담을 하고 싶을 때 내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나는 어떨 때 왜 험담을 하고 싶은가?
-나의 억울함을 풀고 싶을 때
-나의 정담함(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때
-공감과 지지를 받고 싶을 때
-속상하거나 화가 나거나 짜증 나는 등 부정적인 마음을 풀고 싶을 때
당장 눈앞에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입이 근질근질하는 욕구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알아차림이 중요하다. 내 마음이 단단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해야 흔들흔들 근질근질 거리는 순간을 잘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한 번도 남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라던 윤동주 지인의 회고가 생각난다.
그래, 적어도 남을 비난하는 마음으로 하는 험담은 안녕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