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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Oct 07. 2020

<말테의 수기>  중

시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이 젊었을 때 넘치도록 갖는 그러한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한 줄의 시구를 얻기 위하여 많은 도시, 온갖 사람들, 그리고 여러 가지 사물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 아침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미지의 고장의 길들과 예기치 않았던 만남과 멀리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던 이별들, 아직도 깨끗이 걷히지 않은 어린 시절과 자식을 기쁘게 해주려고 했지만 자식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와 … 조용하고 차분한 방에서 보낸 날들과 바닷가에서 맞이했던 아침과 바다 그 자체와 여러 바다와 머리 위로 흩날려 별들과 함께 날아가 버린 여행의 밤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각각이 유달랐던 숱한 사랑의 밤들과 진통 중인 임산부의 울부짓음과 … 죽어가는 사람들의 방에도 있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기억이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기억이 많아지면 그것들을 잊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기억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커다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억 그 자체로는 아직 시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기억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피가 되고 눈길이 되고 또 몸짓이 되어 더는 우리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이 없어졌을 때 비로소 아주 진귀한 순간에 그 기억의 한가운데서 시구의 첫마디가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중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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