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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광호 Feb 05. 2021

콘라트 아데나워

데가스페리의 성공은 독일의 콘라트 아데나워가 나아갈 길을 마련해주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이전에 집권했던 전체주의 정권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아데나워는 연방주의자였다. 하지만 ‘독일의 비범함’을 결코 믿지 않았다. “독일인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벨기에인이다.” 그는 그렇게 주장했다. “프로이센인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 망각한 슬라브인이다.” … 그에게는 독일인이 가지고 있는 인종적 편견이 전혀 없었다.


전후 아데나워의 이력을 살펴보면 정치에서 운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미군이 쾰른을 점령했을 때, 쾰른은 도시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인구는 75만 명에서 32,000명으로 줄어들었다. … 연합군은 나치가 공직에서 쫓아낸 인물을 원래 자리로 복귀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미군은 아데나워를 쾰른 시장 자리에 앉혔다. 몇 달 뒤 1945년 10월 쾰른이 영국 점령지가 되자 그는 해임되었고 추방되었다. 이에 대한 만족할만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당시 노동당이 집권하고 있던 영국은 가능하다면 사회민주당을 지원하려 했다. 


만약 영국이 아데나워를 쾰른 시장 자리에 계속 앉혀두었다면, 그는 결코 새로운 국가의 정치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45년 여름과 가을에 독일 각지에서 기독교민주당 그룹이 등장했다. 그가 쾰른 시장 자리에서 쫓겨난 시기는 의도적으로 보일 정도로 딱 들어맞았다. 그는 기독교민주당 연합을 쾰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서독의 정당 연합으로 조직하고 당을 이끌었다. 


1946년 7월 영국은 라인란트 산업 지대와 베스트팔렌 농업 지대를 합쳐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州)를 만들었다. 주의 국경선은 1919년 아데나워가 구상했던 것과 거의 일치했다. 따라서 영국은 그의 계획을 실현할 완벽한 수단을 준 셈이다. 아데나워에게 또 한 번 행운이 찾아왔던 것이다.


-폴 존슨 <모던 타임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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