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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pr 26. 2024

깨달음에 관한 불편한 진실, 어쩌면 위로 #3

"나의 후퇴"




  무엇보다 우리를 좀 속상하게 하는 것은 '나'라는 것이 후퇴한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방어선.


  궁색한 자기 주장.


  이것만은 침범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호소하고, 그러다가 격렬하게 역정을 내는 아주 작고 가냘픈 것이 되었다.


  자기만의 조그마한 둥지에 틀어박혀 자신이 세상의 대장이라고 삐약삐약거리는 병아리의 모습이 마치 '나'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 '나'의 마지노선을 수호하고 있는 모든 병아리가 무장해있는 것은 신념이다.


  나를 나되게 만들고 그 나됨을 지켜가는 기제를 신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한 정의는 좀 다르다.


  아주 운좋게 아직까지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있던 똥고집이 신념이다.


  똥을 참고 있으려면 전신에 힘을 꽉 주어야 한다. 이 생리적 작용이 어떠한 착각을 유발한다. 무엇이든 참고 버티어내는 자가 힘있는 자고 강한 자라는 착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착각을 공유하는 이들은 신념을 가지면 모종의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고 생각하곤 한다. 신념이 마치 힘을 창출하는 언어적 마법재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인류사에서 가장 신념없이 살았던 일군의 사람들은 바로 선사들이다. 그런 마법재를 만들 턱이 없었고, 만들어진 것은 바로바로 깨기까지 했다.


  선사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봉쇄함으로써 인간을 더욱더 작고 비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언어임을.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자신을 제약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난 척하며 해놓은 말뿐이다.


  그런 말들이 돌아와 우리 자신을 치며 자가당착에 빠지게 한다.


  그 잘남의 말들을 버리면 우리는 그 말들에 기인한 우리의 잘남도 버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버릴 수는 없다. 남는 길은 단 하나다. 


  후퇴다. 후퇴할 수밖에 없다. 나의 후퇴는 필연이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위협하는 자신의 말과 싸우는 섀도우복싱의 일만을 지속하다가, 그 전투 속에 가까스로 생존한 말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진실한 승리의 신념이라고 명명해 끌어안고는, 이것이 '나'라며 세상에서 가장 조잡하고 쩨쩨한 자리에서 자기의 순결함과 정당함을 항변한다.


  산다는 일이 변명으로만 화한다.


  결국 '나'는 변명의 주체를 지칭하는 이름이 되었을 뿐이다.


  비겁과 기망의 이름.


  세상의 가장 후미진 모서리까지 후퇴해 안심하고 몸둘 곳을 잃은 그 이름.


  그러나 우리는 이러려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나로 살기를 꿈꾸었을 때 이 초라한 것이 되기를 꿈꾼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우리가 잘못한 것이 아니다.


  언어에 속았을 뿐이다.


  언어가 그런 것인 줄을 모르고 우리가 언어를 맹신하다가 속았을 뿐이다.


  깨달은 척하는 이들이 자주 하는 표현들인, 나만의 고유한 언어로 나를 만들고, 나만의 개성적인 삶을 서술하는 특별한 이야기로 나를 세운다는 식의 말에도 잘못은 없다.


  몰라서 하는 말이다. 알고도 그런다면 잘못이 되지만, 몰라서 한 것은 다시 배우면 되는 일이다.


  언어에 나라는 것을 위탁할수록 우리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렇게 작아져있을 때 우리는 다시금 언어에 자신을 더욱 위탁하게 된다. 이럴 때는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말로 옭아매려는 경향성을 띠게 된다.


  가장 후퇴한 자리에서의 '나'는 이처럼 세상 모두를 자기가 말로 만든 감옥에 구속하려고 한다. 작고 약한 자신을 언어가 보호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러한 언어의 힘으로 다른 이들도 작고 약하게 만들어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현실을 창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 때 인생은 정말 초라하고 궁색해진다.


  언어로는 자기 생각대로의 그림을 만들어 이긴 것 같지만 실제로 경험되는 것은 패배감이다.


  말로 수작을 부리면 부릴수록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이 언어가 내포한 가장 최저의 역기능이다.


  언어의 속성은 관계적이다. 언어는 상대적 관계로만 구성될 수 있어서다. 때문에 언어를 신봉할수록 필연적으로 나의 절대성은 상실될 수밖에는 없다.


  관계가 지배할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진다. 이는 실증적이다. 관계로 만들어진 온라인 세상에서 개인이란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인가.


  선(禪)은 왜 실존주의와 깊게 상통하는가? 둘 다 상대적 관계의 속성을 가진 언어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전통의 향유자들은 언어 속에는 결코 진리가 있을 수 없으며, 발견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 밖에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야기로 만든 '나'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자명한 나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단 1초라도 나로 살고 싶어하는 우리는 후퇴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승리의 진격을 바라고 있지도 않다. 그 둘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전진과 후퇴라고 하는 전쟁터의 프레임 밖을, 바로 언어 밖을 향하기만을 원한다.


  그것은 결국 나는 원고지와 같은 2차원적 평면선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자기를 주장하지도 않고, 탐미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옹졸하게 고집하지도 않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이 비상한다.


  더욱 크고 열린 하늘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바로 그 삶을 나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기로 우리는 약속했다. 아니 지금 약속하기로 하자.


  나는 3차원의 사실적인 것이며, 사실 그 자체의 분명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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