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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May 10. 2024

영원의 숲 #8

"꿈꾸는 화장실"




  꿈을 오래 묵혀두면 독이 된다. 변비와 같을 것이다.


  꿈은 삶의 부산물이다. 잉여적인 것이지만 필연적인 것이다.


  삶이 곧 꿈이며,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작동한다. 먹고 싸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한다면, 꿈이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꿈을 싸야 유기체로서의 건강한 신진대사를 이루게 된다.


  원활한 배변, 아니 배몽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것은 1차적으로는 바로 이렇게 꿈꾸어진 형상, 곧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숨을 쉬는 것이다. 들이마신 만큼 숨을 배출함으로써 우리는 이 꿈꾸어진 형상을 지속할 수 있다. 지금 이 형상이 이러한 꿈이라며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의 배몽은 말하기로 이루어진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보통은 여기에서부터 배몽의 문제가 시작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안된다는 억압이 가득한 환경 속에서 현대인들은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은 결국 내담자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돕는 활동이다. 물론 이것은 초등학교 학급회의 시간처럼, 모든 구성원이 당당하게 합리적인 자신의 의견을 주체적으로 말하도록 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것은 또 다른 억압이다. 모든 이가 (엄마 보기에) 바르고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일 말만을 하도록 종용하는 시스템의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내담자는 이와 같은 '올바른' 말을 하지 못해 마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말만 하고 살고 있기에 그의 마음이 힘든 것이다.


  "씨발." "좆같네." "어우 썅." "나가 뒈져." "존나 짜증나네."


  내담자들은 바로 이러한 말을 하고 싶다.


  심한 변비에 시달리는 이들이 변기에 앉아 이러한 말들 말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가?


  나쁜 말을 쓰면 나쁜 사람이 된다는 주술적 미신이 있다. 이 미신은 언어의 힘을 맹신하고 신격화하는 이들에게 자주 소비된다. 실은 자신이 언어에 쫄아있는 이들이 이러한 미신을 믿는다. 시크릿 같은 것이다. 그러한 언어를 쓰면 그러한 실재가 생겨날 것이라는 '나쁜 믿음'이다.


  심지어 상기한 말들은 나쁜 말들도 아니다. 그 말들에는 내용이 없다. 그것은 그저 화자의 느낌을 드러내는 감탄사일 뿐이다.


  "와." "오." "읏." "야아." "허어."


  이러한 표현들과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말이란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 이 감탄사들이다. 몰랐던 세상을 만나고 알게 되어 놀랍다는 그 표현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비추어줄 카메라 앞에서만 감탄사를 쓰라고 권유된다. 그 용법에서 벗어난 감탄사는 뭘 모르는 자의 증거다. 이미 알고 있는 유능한 사람처럼 행위해야지, 감탄사로 말미암아 무지를 티내면 안된다고 배운다.


  또는 자기 엄마도 좋아할 '바르고 힙한 것' 앞에서만 감탄사는 허용된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면, 엄마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말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인 줄 알고 산다. 그런 말을 하면 익명의 엄마들에게 칭찬을 들으니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대단히 제대로 살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엄마들도 실은 그런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마릴린 맨슨은 모든 부모의 모순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부모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가 하라는 것만 해. 그리고 내가 하는 것은 하지 마.'"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든 인간은 감탄사에 끌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숙명 같은 것이다. 신비와 친하도록 운명지어진 인간의 본성이다.


  결국 감탄사는 자연스러운 배몽의 현상이다.


  이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삶의 방향성을 계속 가로막으며 억압하면 끝내는 변비가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변비의 상태에 정직하다면 감탄사는 또 흘러나온다. 암울한 자취방의 황태 낀 낡은 변기 위에서도 붓다는 태어난다. 어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기회는 있는 것이다.


  인간이 건강한 유기체로서 자신을 회복할 그 기회가.


  화장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좋은 곳이다.


  좋은 곳이어야 한다.


  몽환적인 느낌으로 화장실을 꾸민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오래 참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것을 그 순간 한다면 그때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영원이다.


  우리가 현존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영원의 감각을 일정 부분 시사한다. 현존의 상태를 이루는 주요한 기제를 인본주의 상담자인 칼 로저스는 분명하게 일치성이라고 말한다. 삶에 대해 어떤 앎의 메뉴얼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즉자적인 그 자신으로서 바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 경우 마음을 따라 산다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마음과 하나되어 사는 것이다. 이미 둘이 아니다. 니가 가는 길이 곧 내가 가는 길이라고 예수는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가는 길이 곧 제가 가는 길이라고 즉각 화답한 이가 있다면, 그는 그날 예수와 함께 천국의 저녁만찬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말들을 많이 하고 싶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라고 떠올리면 기분이 아주 좋다.


  나는 나만의 길 같은 것은 가지 않는다.


  영원의 향기가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이다.


  우리는 함께 꿈꾸는 화장실로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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