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피해야 할 심리적 방편"
명상을 통해 알아차림의 능력을 배양하는 일을 해온 이들이나, 심리상담의 활동을 통해 마음을 자각하는 일을 해온 이들이나, 이들이 자주 빠지게 되는 함정이 있습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한순간 의식이 확장되는 체험을 하게 된 이들 또한 쉽게 빠지곤 하는 함정입니다.
이 함정에 빠지면 헤어나오기가 정말로 힘듭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상담을 가르치거나, 마음에 대해 가르칠 때, 이들이 가장 귀머거리가 되어 완고해지는 지점은 바로 이 함정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 함정의 이름을 임의적으로 '영적 자위'라고 명명해보겠습니다.
영적 자위는 이러한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자신을 너무나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받던 이가, 하루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 내가 아무리 거부해도 이 마음이 오잖아. 이제는 그만 저항하고 받아들여보자. 아무리 힘들어도 한번 마음을 수용해보자. 이거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잖아. 내가 소외하는 내 마음이잖아. 아무리 아파도 내가 품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내 마음이잖아. 그래, 우리 한번 평생 같이 살아보자. 무섭고 떨리지만 한번 해보자."
이와 같은 생각이 각오가 되고, 의지가 되어, 말로 토해지고, 글로 써지는 가운데, 또 신체적으로 경험되는 가운데, 한순간 이 마음이 다 받아들여지는 것 같은 순간이 옵니다. 더는 마음이 힘들지 않고 평온해지며, 모든 것이 아무 문제없이 충만하고 온전해진 감각이 전신을 지배합니다. 눈물도 흐르고, 웃음도 나옵니다.
아주 가볍습니다. 이 마음 때문에 그토록 힘들어했던 것이 거짓말 같습니다. 바깥을 보니 햇빛도 나를 축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사람들의 얼굴도 다들 행복해 보입니다.
아, 이거였구나.
이런 게 온전함이구나.
나는 왜 그동안 이렇게 바보처럼 내 자신을, 이 마음을 미워하며 살았을까.
그냥 이렇게 받아들이면, 내 자신을 인정해주면 되었을 뿐인데.
내 못난 것들과 부족한 것들을, 자꾸 그러지 않겠다고 저항하지 말고, 그냥 그러한 것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이렇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마음인데.
모든 것이 다 온전하다.
참 좋다.
고마워요, 아빠엄마.
고마워, 친구들아.
고맙습니다, 여러분.
제가 못났어도, 그럼에도 참 괜찮은 사람이에요. 다들 서로 사랑하며 오래오래 지구에서 함께 놀아요.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한 이는 이제, 자기가 어떤 경지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며, 이제는 마음에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그렇게 무력하고 약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자신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후술하겠지만 물론 이들은 깨달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이들이 이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누거나, 권위있게 가르치거나, 또는 돈을 받고 팔거나 하게 될 그 내용이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세부사항은 조금씩 차이가 있겠지만, 그 핵심은 똑같습니다.
"마음을 내 마음으로 꼭 안아주세요. 내 가슴으로 마음을 받아서 아프면 아픈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 마음을 잘 느끼면서, 그때그때 표현되는 것을 표현되게 하면서, 마음을 그렇게 내 것으로 소중히 품어주세요."
나아가서는 이러한 말도 이어집니다.
"모든 마음은 이렇게 온전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마음입니다. 안 괜찮은 그것도 괜찮습니다. 마음이 내 가슴에 안겨 있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내 마음아, 미워도 싫어도 내 마음이야. 너랑 같이 있을 거야. 마음에게 이 말을 들려주세요. 혼자 외로운 곳에서 참 고생했구나. 참 힘들었구나. 이제 내가 있어. 이제 내가 알아주고 있어. 응응. 그래 괜찮아."
조금 수줍어하는 이들은 이러한 것을 마음에 대한 비밀의 원리 같은 것으로 삼아 혼자서만 조심스럽게 실천하거나 주변에만 살짝 알려주며, 조금 대담한 이들은 이러한 원리를 알고리즘화한 뒤 심리학이라는 포장지를 붙여 수십만 원대의 상품으로 판매하기도 합니다.
대체로 전자는 영적 우월감 정도로 끝나게 되지만, 후자는 영적 사기꾼이 됩니다.
자기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 모자라, 남의 인생을 낭비하게 만드는 진성 사기꾼이 됩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아령을 한 시간 정도 들고 있게 한 뒤 그 아령을 내려도 괜찮다고 말하면, 아령을 들고 있던 이는 아주 상쾌한 가벼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위에서 묘사한 원리가 바로 이것과 같습니다.
사실 아무 원리도 아닙니다.
한참을 힘들다가 뭔가가 편해지니까, 여기에는 마치 대단한 마음의 원리가 숨어있는 것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비밀의 공식이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물론 굳이 말하자면, 여기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성의 내재화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성은 품어주고 수용하는 힘의 상징입니다. 이 힘이 개인의 내면에서 자연스레 발현될 때는 그 개인이 너무나 지쳤을 때입니다. 이는 실제의 엄마가 아이를 '잘 돌보려는 일'에 지쳐 힘이 빠졌을 때 오히려 아이에게 더욱 수용적인 자세가 되어 잘 돌보게 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힘이 빠진 상태에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엄마에 대한 아이와 같은 입장이 되어 엄마인 자신에게 부드럽게 수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와 같이 마음이 칭얼거림을 멈추고 편안해진 상태가 되는 것처럼 경험되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모성의 힘을 사용한 개인은 이제 마음의 힘겨움을 끝낼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은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떠한 마음이 문제로 경험된다 하더라도 이 내재화된 모성을 활용하여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은, 자신이 아이인 걸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자신을 아이로서 자연스럽게 수용해주는 엄마와 같은 마음에 안긴 것뿐입니다. 즉, 아이-엄마라는 하나의 마음작용을 경험한 것뿐입니다.
이를테면, 엄마가 늘 그립지만 이제는 성인이 되었기에 엄마의 품에 안겨 응석을 부리기가 힘들어진 개인이, 그 자신의 내면에 엄마를 창조해내 그 품에 안긴 현실입니다.
자신이 고집스럽게 "응애응애!"한 뒤, 바로 자신이 "그래그래 내 아이야."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자위입니다.
무슨 마음에 대한 신비한 영적 메카니즘이 작동하는 것처럼 언술화하기에, 영적 자위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영적 자위를 통한 평온감이 경험되면, 이제는 자연스럽게 퇴행이 일어납니다.
엄마의 품 속에서 자기가 무적인 줄 알고 유세를 부리던 유아의 입장이 확 돌출되어 강화되고 공고화됩니다. 그리고 이제 남의 말은 잘 듣지 않게 됩니다. 자기에겐 엄마만 있으면 세상 무서운 것이 없던 그 퇴행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삶의 작용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힘든 일이 생긴다 싶으면, 이 퇴행한 아동의 상태는 자연스럽게 동전이 뒤집어지듯 엄마의 상태로 전환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합니다.
"그래, 또 왔구나. 계속 오는 너를 내 마음으로 이제는 이해해볼게. 우리 한번 같이 살아보자. 내가 한번 만나볼게. 내 가슴에서 쉴 수 있게, 내 가슴을 더 넓혀서 네 자리를 만들어볼게. 괜찮아. 내가 있어. 엄마가 있어. 너를 수용할 거야. 다 품어줄 거야. 얼마나 혼자 외로웠을꼬.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을꼬. 참 힘들었겠구나. 그래, 그래, 맞아, 이렇게 힘들었어. 이렇게 아팠구나. 이러한 눈물로 가득했구나, 네가. 그래, 그래, 이제 알겠어. 이제 된 거야. 참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리고 만약 이러한 영적 자위를 하고 있는 이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지나가던 그 이는, 손가락을 자기 머리에 뱅글뱅글 돌리며 '저 사람 자폐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사실 그러할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합니다.
자위와 자폐는 같은 작용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모양새가 이처럼 외현적으로 참담할 뿐더러, 실제로 효능도 좋지 않습니다.
이 모성의 내재화를 통한 이 방편의 효능은 대개 한 달도 못 갑니다. 소위, 괜찮아지는 상태가 되기까지 "그래그래, 엄마의 넓은 가슴이 여기에 있어. 너를 수용할 거야."를 주문처럼 반복하는 시간은 갈수록 길어집니다. 그 작업시간은 길어지는 반면, 결과로 찾아오는 이완감의 지속도는 짧아지며 강도는 약해집니다.
게다가 이 영적 자위를 하는 이들이 솔직하게 잘 떠올려보면, 이번만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도 무수하게 조금 다른 언어와 조금 다른 논리로 늘 반복해왔던 일입니다.
이를테면, 그 효능이 떨어질 때마다 어떤 때는 분아적 접근이란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소인격체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마음만나기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분석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자유연상이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가족치료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때는 다중적 이야기치료라는 이름으로, 늘 동일하게 붙여넣기처럼 반복해왔던 일입니다.
이들은 무슨 일을 끊임없이 해왔는가?
바로 '마음을 다루는 일'을 해온 것입니다.
지금도 마음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룬다는 것은 마음에 대해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노력하는 것과 같이, 이들은 마음에 대해 늘 노력합니다. 엄마가 아이를 지켜보려는 것과 같이, 이들은 마음을 늘 지켜보려고 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마음이 편해진 것 같기에, 즉 자신이 열심히 감정도 표현하고, 소리도 지르고, 글도 쓰고, 눈물도 흘리는 등, 뭔가 자신이 노력한 만큼 마음이 온전하게 경험되는 것 같기에, 이들은 자신의 노력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영적 자위를 하는 손동작을 결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온전함이라고 하는 마음의 행복이 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 자위라는 함정에 빠진 이들이 이제 앞으로의 길이 막혀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이들에게 전제된 현실의 명제는 사실 이러합니다.
"행복하려면 다 내 힘으로 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자기는 그저 보고 품기만 할 뿐이고, 하는 것은 마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나입니다. 마음이 하는 것도 내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고, 그 마음을 수용하고자 하는 것도 내 에너지가 쓰이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내 에너지를 써서 다 내가 해야 한다는 논리는, 자위의 현실에서만 통용되는 자폐의 논리일 뿐입니다.
만약 자위의 반대편에 섹스라고 하는 개념을 놓는다면 모든 그림은 선명해집니다.
아무리 혼자 노력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섹스입니다. 자위의 논리로는 아무리 혼자 열심히 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섹스의 현실입니다.
결국 이 영적 자위에 빠진 이들은, 엄마의 품에 안겨, 섹스의 현실을 포기한 이들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온전하다고 말만 주장하는 이들입니다.
그렇게 주장하게 되는 이유는, 영적 자위를 통한 일시적 결과로 이들이 자신을 당당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힘에 입각하여, 이들은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적 자위에 빠진 남성의 경우라면, 자기가 영웅적 남성상에 가까워진 것처럼 그 이미지와 동일시하게도 됩니다.
그러나 전적인 착각입니다.
전술한 것처럼,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듯한 상태라 그 품 안에서만 자신이 힘있는 존재처럼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평생 엄마의 품에 안겨, 그러면서도 자신이 심리적으로 건강한 남성어른이라고 착각하며, 도무지 애인지 어른인지 자신도 알 수 없는 형편 속에서, 그저 에라 모르겠다, 마음은 온전하다, 내가 다 받아줄게, 만을 반복하며 살게 되는 인생이 있습니다.
함정에 빠진 인생입니다.
자기가 뭔가 좋은 것을 얻은 것만 같기에 함정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안하게 되는 그런 함정에 빠진 인생입니다.
방편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기회에, 특정한 용도로만 활용되는 특수재입니다. 이 방편을 마치 모든 차원에서의 만능열쇠처럼, 마치 이것만 알고 익히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드래곤볼과 같은 소재로 삼을 때, 함정은 언제나 작동합니다.
함정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흐르는 것은 시간이고, 낭비되는 것은 인생입니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우주와 같이 커다란 엄마의 가슴이 되어 수용하는 이러한 류의 방편은 빨리 옆으로 치워야 합니다.
자위만 하다보면, 섹스에 대해 모르게 됩니다.
영적 자위만 하다보면, 도무지 삶의 깊이를 모르게 됩니다.
삶의 깊이를 안다면, 아 이런 마음이었구나, 라며 마음을 만나느니 하는 일 따위는 하지도 않습니다.
다스베이더 가면을 벗기며, 아 우리 아빠였구나, 나처럼 인간적인 얼굴이었구나, 감동,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자위를 위해 씌운 콘돔을 벗기며, 아 부드러웠구나, 나의 2차 성징이 지난 성기는, 감동, 하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작해야 내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나, 또 내 스토리가 온전한지 아닌지나 점검하며, 그 점검의 결과에 따른 나르시시즘의 감동을 얻기 위해서만 낭비하기에는, 그러한 자기완결적 자폐의 이야기만 반복해서 소비하기에는, 우리가 인생에게 좀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