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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Apr 01. 2020

운전 3일 차만에 외제차 긁은 썰

"그래도 운전해야 해. 무섭다고 안 하면 계속 못한다."

*제 글을 읽다 불편하셨을 분들을 위해, 다소라도 해명을 하고자 합니다.

  - 제가 다른 분의 차를 긁은 것은 매우 죄송하게 생각하며, "나는 사고를 쳤지만 잘못없어, 계속 이렇게 운전해야지"라는 의도로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 사고 이후에 더는 다른 분들께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내차는 긁어도 되지만 남의 차는 안 된다." 라고 생각하며 항상 주차할 때, 우회전, 좌회전을 할 때 최대한 조심하고 있습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는 아직 멀었다 생각하며 앞으로 3년 이내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뗄 생각도 없습니다.

-  외제차 사고 이후 운전연수 20시간 이수했으며, 다음날 고속도로를 탔다는 것은 운전연수 강사님과 동행 하에 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질까 제 의도를 다 전달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하나의 에피소드와 전달하려고 하니,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생략했나 봅니다. 다 제 역량의 부족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더욱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 피드백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오해에 소지가 있는 부분은 수정하였습니다.



 내 운전 면허증은 장롱에서 5년을 묵었다. 나는 5년 차 장롱면허 소지자였다.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도해본 적은 있다. 하루는 아빠가 인적이 드문 길에서 운전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셨다. 그날, 엄마와 이모할머니의 운전 연수를 도맡아 하시며 단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아빠는

“얘는 운전하면 안 돼. 큰일 나. ”

라고 말씀하셨다.


 그로부터 5년 뒤, 나는 차를 샀다. 아직 문짝 하나만 내 것이고 본체는 카드사의 것이긴 해도 나의 첫 “빠방이”가 생기고 나니 첫 발령 이후로 잠시 접어두었던 커리어 우먼의 꿈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출장을 갈 때 서류와 책자 등을 착착 챙겨 조수석에 놓고 여유 있게 갈 수 있겠지. 스트레스받은 날 한강에 라면 먹으러 갈 수 있겠다. 우울한 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동해를 가도 좋겠지. 이 모든 과정을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내가 선택하고 바로 실행할 수 있다. 크. 나는 멋진 여성. 사랑스러운 빠방이.


 나는 운전에 대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이 있었다. 운전 연수 강사님이 겁이 없어서 금방 배우겠다고 하셨다. 나의 근자감은 더욱 고양되었다. 지난날 아버지가 인자하게 뱉으신 “큰일 나.”소리는 다 옛말이었다. 이미 나는 내 빠방이를 몰 수 있는 멋지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그때쯤, 나의 취미는 운전 연수를 받고 난 뒤 엄마에게 자랑할 겸 보고하는 전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날도, 한껏 자랑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럼 내일 운전해서 출근해봐.”

라고 하셨다. 차로 10분 거리. 못할 것 없지. 나는 그다음 날, 운전 연수 강사님께 허락을 받지 않고 혼자 운전을 해서 출퇴근을 했다. 주차도 (아주 오래 걸렸지만) 성공했다. 이제 나의 자신감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혼자 운전을 시작한  3 만에 BMW 긁었다. 그날의 나는 자신 만만하게 출근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 통과. 배운대로 우회전을 해서... 초보는 몰랐다. 우회전을 하면 당연히 도로여야 하는데, 불법주차된 외제차가 있을 줄은. 우회전을 하자마자 마주친 BMW에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지만 이미 늦었다. BMW의 사이드미러를 내 차의 사이드미러로 '콩' 치고 지나갔다. 차라리 내 사이드미러가 떨어져 나갔으면 더 좋았으련만, 애석하게도 내 차는 너무나 멀쩡했고, 상대의 차는 깜빡이 등 부분에 금이 갔다.


 차에 남겨진 전화번호도 없고, 차주가 1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경찰을 부르고 자백을 해보았다. 보험처리까지 하고 풀이 잔뜩 죽었다. 퇴근하는 길, 내 차를 스쳐 가는 차들, 길에 주차된 차들만 봐도 겁이 났다. 이번엔 자랑이 아니라, 맘이 상해서 엄마께 전화해서 털어놓았다. 무언가를 긁거나 박을 것은 예상했지만, 그게 외제 차라서, 생각보다 더 빨라서 좀 놀라신 듯했다. 나는 더욱 작아졌다. 그런 나에게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래도 운전해야 해. 무섭다고 안 하면 계속 못 한다.”


엄마는 특유의 농담 섞인 목소리로

“너네 아빠가 너 그럴 줄 알았다고 했어.”

라며 놀림반, 위로 반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그리고 사람 안 다친 게 다행이다. 경찰도 부르고 보험처리도 문제 안 생기게 잘했다. 엄마, 아빠도 다 실수했어. 그리고 마지막에 엄마는 이 말로 마무리하셨다.

“그래도 우린 지금도 운전을 하고 있지 않니. 다 그런 거야.

다음날 나는 강사님과 고속도로 주행을 연습했다.


그 뒤로도 (초보가 보기엔)좁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다 나의 빠방이 앞문짝을 긁어먹기도 하고, 후진을 하다가 튀어나온 철장을 보지 못하고 뒷문짝을 콕하고 박기도 했다. 부모님은 새 차 앞에서 생각보다 더 어마무시한 딸의 행태에 흠칫 놀라신 듯하였으나, 그래도 현실적인 조언과 함께 항상 마무리 말로 이 말을 해주셨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지금 안 하면 계속 못 해.”

대신, 지켜봐 주셨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는지, 겁에 질려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도움이 필요할 때만 “뒤에서 봐줄게. 왼쪽으로 좀 더 가봐.”라고 말씀하실 뿐, 핸들은 언제나 내가 잡게 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멋지게 차를 몰고 다니는 커리어우먼의 꿈을 접었다. 스스로가 어이없는 행태에 초보 스티커는 3년간 떼지 않기로 굳게 마음 먹었고, '초보운전자 이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골목길에 우회전 할 땐 언제든 불법주차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방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 나는 주차를 더럽게 못하는 구나. 그래서 평행주차까지 마스터하기 전엔 주차가 힘든 곳은 당분간 가지 않는 것이 통장을 거덜내는 일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좁은 주차장에서 후방 카메라만 믿지 않고 양 사이드미러를 활용하는 법을 체득했고, 고속도로에서 나에게 시속 110키로 이상은 사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실수하고 겁을 내면 부모님은 실수를 피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으셨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크게 비난을 하거나 혼을 내지 않으셨고, 대신 그 상황에 노출시키고 판단을 나에게 맡기셨다. 시험을 망쳐서 울며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엄마는 걱정과 위로보단, 웃음을 택하셨다. 울고 있는 딸 앞에서

“뭐야, 영어 시험 때문에 우는 거야? 허, 나는 그거 드라마나 시트콤에서나 그런 줄 알았는데.”

라고 말씀하시며 시험 망쳐서 울었다고 온종일 놀리셨다. 덕분에 나는 눈물을 멈추는 대신 분노했지만, 한 편으론 ‘사실 별 게 아닐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했다.


 상처가 많았던 연애로 우울증을 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괜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입을 떼면 들어주셨고, 그 말에 대해 평가하지 않으셨다. “그냥 힘들면 울어라.”라고만 하셨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갑자기 울어도, 엄마는 그냥 나를 안았고, 아빠는 그런 우리를 지켜보았다. 뭐든 잘할 것 같은 큰 딸이 '네이트 판'에 나올법한 충격적이고 파격적인 이별을 겪은 후에도 연애 걱정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시고, 나의 '연애 핸들'을 믿어주시는 부모님 덕분에 천천히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해볼까?'라는 생각을 시작했다. 물론 그다음 연애도 충격적으로 끝났지만, 다시 빛을 보게 된 나는 ‘이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내가 나에게 준 가장 큰 위로였다. 그래서 그 뒤로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고, 이별할 수 있었다.


 덕분에 '연애에 대한 환상'은 어느 정도 접을 수 있었고, '연애 초보 이솔'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실수 같은 연애를 반복한 뒤에도 내 마음 하나는 건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알려주셨던 것처럼. 아프게 헤어지면 당연히 다음 연애는 두려운 게 맞는 거라고. 그 상태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지금은 많이 다쳤으니 잠깐 멈추자고 얘기한다. 그렇게 마음을 가만히 지켜봐 준다. 하지만 ‘사랑 같은 건 없어.’ ‘이제 남자를 어떻게 믿니!’와 같은 말로 너무 청승을 떤다 싶으면 생각한다.

그래도 해야 한다. 지금 안 하면 계속 못 해.

그러고 나면 혼자서 늙어 죽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며 웃음이 난다.



 다 큰딸은 그렇게 또 부모에게서 배운다. 나는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았지만, 최소한의 위로와 최대한의 따뜻함 덕분에 그 누구도 탓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 계속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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