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솔 Dec 28. 2020

생기부는 쓰기가 싫다.

  학기말, 생기부 작성 철이다.

  다행히 나는 그동안의 데이터를 든든하게 쌓아두었다. 아이들은 학습지를 한낱 종이로 보았겠지만, 보아라, 이것이 모두 너희의 생기부에서 살아있는 문장으로 태어날 터이니. 코로나 19 따위, 나의 생기부 작성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하기가 싫다.      


하루는, 친한 선배 선생님과 이야기를 했다. 

- 이게 참, 글로 쓰려니까.

- 차라리 어머님께 전화해서 그동안 애가 어땠는지 입으로 터는 게 낫겠어요.

- 자기는 찐 문과라며.

- 주둥아리만 문과였나 봐요.      


 그렇다. 이 친구가 1년 동안 어떤 학생이었는지, 교육부가 비공식적인 문장을 허용한다면 나는 둑이 터지듯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생기부에는 도무지 그걸 쓸 수가 없다. 이 아무개는 사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원을 구하는 공식도 잘 까먹지만, 람보르기니 역사와 종류는 연도별로 줄줄 욀 수 있다고. 원래 요새는 덕질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법이니, 이 친구 잘 지켜보시라고. 이 어마어마한 집착과 에너지는 10대 사춘기 청소년에게서는 볼 수 없다고요. 이 친구,  성격도 보통이 아니랍니다. 크게 될 친구 아니겠습니까. 아 참, 심지어 스포츠카로 경주하는 온라인 게임도 참 잘한답니다! 이렇게 쓸 수가 없다.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의 흥미와 관심 있는 분야를 잘 알고 있음.’이라던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여 학업에 대한 도움이 지속한다면 무궁한 발전이 기대됨.’과 같은 문장으로 써야 한다. 내가 써놓고도 이상하게 여름에 물가를 조심하라는 점쟁이의 점괘 같이 아리송하다.

 

 생기부를 쓰다 보면 힘이 죽 빠진다. 얘는 평소에 가만히 있다가도 진짜 골 때리게 웃길 때가 있는데. 이건 진짜 부모님이 모르실 텐데. 이걸 어떻게 쓰지. 얘는 깝죽거리는데 그게 안 미워. 선을 안 넘어 애가. 이거 어떻게 쓰나. 아, 얘는 뭐만 하면 ‘샌즈’라고 읊조리는데. 이거 큰일이네. 재미가 없다. 애들은 알아들으려나. 아, 하기 싫어. 아, 내일 제출인데. 다, 이 쌤이 어휘력이 딸리는 탓이다. 기깔나게 쓰는 분들도 많은데.


그러니까, 얘들아. 

쌤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고.

거기 쓰여 있는 그 너희에게 어울릴까, 말까 한 말 말고.

어른들은 너희를 집에서 학교 얘기 한마디를 안 하는 사춘기 친구들로 아시겠지만, 알고 보면 진짜 웃긴 애들이라고. 그러니까 안심하시라고. 우리 참 재밌었다고. 그렇게 쓰고 싶은데.

그럼 결재를 안 해주시겠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