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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솔 Dec 13. 2023

줄타기

나는 현재 긍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부정적인 상태이다. 김이 “오늘 뭐 할래?” “오늘 뭐 먹고 싶은 거 있어?”라고 묻는다면 “아무거나.”라고 대답하고는 이것저것 제안하는 김에게 결론 적으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으며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는 속 터지는 상태이다.


 내가 이렇게 부정적인 상태가 된 것은 이전의 상태가 “무한의 긍정적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뭘 해도 재미있고,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던 의지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에게 있었다. 결혼준비와 동시에 갑자기 바뀌어 버린 업무 시스템을 붙들고 있었지만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내가 대견하고 나와 내 세계를 사랑했다.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과 탐구심으로 가득했던 시기. 나에게도 그런 생기발랄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계속 멜로드라마의 명랑 여주인공처럼 살아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최근 처음 알았다. 결혼 후 행복한 날만 가득할 줄 알았던 나와 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났는데, 커다랗고 충격적인 악재에 만사 “괜찮아 “, “그럼에도 감사합니다.”를 외치다가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져버렸다. 회사에 휴직을 신청하고 집구석에서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용감하게 덤비던 여주인공은 블러처리된 조연들 사이로 숨어버렸다.


 막상 숨고 나니 드는 생각은 “지긋지긋하다.”이다. 이제 무슨 "일" 이라고 하면 정말 지겹다. 나에게 아무 일도 주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배가 고픈 것도 귀찮다. 그냥 배가 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에게 미뤄둔 답장도 미안하지만 답을 하기가 싫고 만나기는 더더욱 힘들다.


 예전의 나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연락을 해오기도 하고, 나를 걱정하며 내가 잘 이겨낼 거라고, 지금은 쉼의 시간이고 이 시간을 '나답게' 잘 지내고 올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마음 상태로 대답하자면 “글쎄.”다.


보통 사람들은 긍정적인 영향력에 대해서만 생각하지만, 긍정적인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에 반대되는 부정의 힘도 크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순수 파괴의 상태다. 그리고 그 힘은 내가 무한 긍정의 시기였던 만큼 힘과 영향력이 크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중에서 나의 검은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남편 김은 일단 나를 모든 일로부터 격리시키기 시작한 장본인 중 한 명이다. 그래도 회사는 가야 되지 않겠냐는 나를 뜯어말렸고, 양가 집안일에 대해서도 내가 포함되지 않도록 애를 썼다. 매일 침대 속에 파묻혀있는 나의 기름진 이마에 뽀뽀를 하고는 잘 쉬란 말만 남기고 출근하고 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걸까?”

내 질문에 김은 답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쉬고 있는 거잖아.”

처음에는 따뜻하고 애정 어린 위로는 없이 쉬라는 말만 반복하는 김에게 서운한 맘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김의 그 말이 응원처럼 느껴진다. 부정과 긍정의 균형이 무너진 내가 얼른 균형을 되찾아 삶의 줄타기에 다시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비축해도라는 응원으로 들린다.


삶은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왔다 갔다 잘 조율하며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나는 너무 긍정적이었고, 너무 부정적이라 그 바닥에 떨어지고 만 것이고. 하지만 추락했다고 해서 삶은 끝나지 않고, 새로운 줄타기를 시작하려고 준비를 한다. 아마 내가 멈춘 것은 새 시작을 위한 몸풀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김을 비롯한 나를 둘러싼 괜찮은 사람들과 사랑들 덕분이겠지.


그렇다고 지금 다시 시작해 본다는 건 아니다. 아직 여전히 귀찮고 힘들다. 하지만 이 엉망진창의 끝이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꽤나 괜찮은 기분이 든다. 지금은 쉬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음에 또 다른 줄타기를 시작한다면 그땐 극과 극으로 달리지 말고 긍정과 부정의 적정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고 싶다. 나도 이제 괜찮은 어른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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