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영어로 옮기겠다면 leaving work on time 어색함.
“명현 씨, 영어 가능하지?
아는 형님 회사에서 급하게 사람을 찾는다는데.
이력서 좀 줘 볼래?”
무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지인의 한마디에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이력서 건넸습니다.
면접 후 입사를 했고 그때서야 현타가 왔습니다.
‘아, 회사생활.. 나 자.. 잘할 수 이.. 있겠지?’
회사라 함은 왠지 TV나 영화 속에서
불합리와 부조리 그리고 권위에 짓눌림의 상징으로 자주 묘사됩니다.
드라마 속 충격으로 남았던 장면들이 떠올라
아차! 싶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사업을 하셨다는 대표와
20대 직원들을 보며 내심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 곳은 상식이 통하는 곳 일 것 같군, 후훗!’
하지만 웬걸…
대 반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법이 바뀐 후
야근을 하면 큰일 나는 문화인 줄 알았는데
그곳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하나같이
더 열심히 일 하는 모습에 의아했습니다.
낮에는 실컷 여유를 부리다가 왜 이제야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건지...
왜 평소답지 않게
컴퓨터 모니터를 뚫고 들어 갈 마냥 집중을
하는 건지.. 영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조직 자체를 등한시하는
개념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퇴근 시간 후 꼭 남아있어야 하는 경우에는
군말 없이 야근을 했습니다.
저 또한 회사를 위한 건강한 충성도를 지닌
1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효율성 제로,
눈치 보기 식 야근 패턴과
그대로 굳어진 무언의 질서는
제 눈엔 삶을 좀먹는 적폐 와도 같았습니다.
보아하니 다들 당일 업무는 끝났고
컴퓨터만 있으면 얼마든지 쳐낼 수 있는
업무였습니다.
어느 날 동료 중 한 명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나 오늘은 칼퇴해야 해. 약속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정시에 퇴근해도 나쁜 사람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냥 제시간에 퇴근하면 될 것을..
다들 정시 퇴근을 하는 날은
정시에 나갈 것이라는 실드 (방어) 형 멘트를
사전에 공유하는 것이 어느새
기본값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음속으로 ‘제시간에 퇴근하는 것뿐인데
왜 굳이 ‘칼’퇴지?
지정된 시간에 퇴근하는 것은 그냥 ‘퇴근’이 아닌가. 왜 굳이 ‘정시 퇴근’, ‘칼퇴’라는 용어로
법으로 지정된 시간에 퇴근하는 사람에게
‘회사를 생각하지 않는 매정한 사람’의 프레임을
씌우는 거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한 동안은 저도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도
쭈뼛쭈뼛 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는 날도 있었습니다.
‘용기’라는 말은 좀 과장된 표현입니다.
실상 죄짓는 사람 마냥 구구절절 이유를 대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던 제 모습을 기억하니까요.
저는 야근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조직이 원칙과 조화로만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안일함 만을 원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편안한 종살이를 기대하는 노예에 불과하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유토피아가 아닌 엄연한 자본주의 사회이며
그 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종종 비인간적인 요소를 포함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해야
살아남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굳이 매일 저녁이 없는 삶으로
애사심과 충성심을 각인시켜야 하는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야근을 한답시고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그 업무가 꼭 성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매일 업무에 야근을 기본 값으로 넣음으로써
오히려 일이 늘어지고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듯이
직원들도 ‘좋은 게 좋은 거야’ 하며
봉사와 헌신의 개념으로 야근하지 않습니다.
야근을 해서 개인 시간의 손해를 입는 만큼
다른 영역에서 안일하게 대처하거나
오히려 보이지 않게 개인 실속을 챙기려 합니다.
물론 주인의식을 가지고 매번 야근을 감내하는
직원들이 있다 손 쳐도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리가 남이가’ 식의 맹목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오너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제가 지구 반대편에서 경험한 회사 문화입니다.
그중에서도 퇴근 문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나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by 유 명현 p.130
‘실리콘밸리에서 천재들과 함께 일하다’ 편 발췌>
“야근은 애사심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회사에서 정해 준 제한된 시간 안에
자신의 일을 해낼 수 없었다는 상징 일 뿐이었다.
다른 회사에서 일하던 내 친구는 야근을 너무 자주 한다는 이유로 매번 극단의 경고를 받더니
급기야 가차 없이 해고를 당했다.
미국 노동법상 추가 수당이 꽤 높은 이유로
오히려 사측에서 야근을 꺼린다.
야근이 잦다는 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다는 무능력 함의 상징뿐만 아니라 다수가 없는 틈을 타
회사에 해를 끼 칠 가능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물론 선진국의 문화가 절대적 진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회사에 얼마나 오랫동안 남아있느냐 보다 중요한 본질은 맡겨진 일을 해내느냐 이겠지요.
막연한 ‘열심히’ 보다
‘잘’ 해내느냐 가 더 중요하겠지요.
구글을 비롯한 미국의 큰 기업들은
‘개인 리듬에 맞춘 업무 시간제’를 도입시킨 지
오래입니다.
직원을 배려하는 천사 오너의 자비로움 같이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책상에 오래 앉아있는 애사심
그딴 것 필요 없으니
‘성과를 내달라’고 대 놓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칼퇴”라는 용어는 영어에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굳이 구구절절 풀어서 설명해야 합니다.
"I leave work on time."
'저는 정시에 퇴근을 합니다'라는 말이
영 어색합니다.
'저는 지구에 삽니다',
'저는 산소가 있어야 호흡할 수 있습니다'처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굳이 왜 그걸 말로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갖게 할 뿐입니다.
야근보다 더 힘든 건
“우리 삼겹살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 거지?”라는
무시무시한 한마디였습니다.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같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회식 선전포고는 영 달갑지 않았습니다.
마시기 싫은 맥주, 전혀 알고 싶지 않은
개인 적 에피소드와 영양가 제로의 업무 외 이야기들이 모두의 저녁시간을 좀 먹었습니다.
이렇게 선 긋기와 선 넘기가 끝없이 반복되는
회사 생활 가운데 지친 영혼들은 하나 둘
퇴사를 선택했습니다.
같은 시기 다른 회사에 근무하던 지인들도
비슷한 류의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고유한 사내 문화와 정서에 타협하지 않고
퇴사를 선택했습니다.
프리랜서 선언을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속감이 주는 안정성과 따박 따박 꽂히는 급여보다 외줄 타기를 하는 듯한 아슬아슬함을
기어이 택한 그들은
남 부럽지 않은 수익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 밑에 일 하기 싫어서 라기보다는
자신이 온전히 홀로 설 수 있는 역량의 사람이라는 확신을 믿고 이행한 것입니다.
만성적인 불평 가운데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OR 불확실한 미래로 손을 뻗을 것인가 의
기로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 아닐까요.
합리적인 조직문화 가운데
지금의 회사생활을 만족하시는 분이라면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 계시는 분들 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동시에 변화를 원하는 자 에게는 반드시
자발성과 용기가 요구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칼퇴는 영어에 없다’라고 한 마디 던져주고는
얼떨결에 너무 심오한 주제로 들어와 버렸네요.
미안합니다;;
저는 글쓰기에 있어서는
영원히 퇴근하고 싶지 않은 작가입니다.
글쓰기에 시간을 다 뺏기고
지금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 가슴이 설렙니다.
정시 퇴근, 칼 퇴근 안 해도 되니
다음 책을 계약하고 글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
이 처럼 여러분을 설레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리고 끼니를 건너뛰었는데도 억울하지 않을 만한 일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