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의 숙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엄마를 다시 사랑하기 까지>
‘그래도 딸 하나는 있어야지’라는 표현은
‘살갑게 구는 자녀가 좋다’와 동시에
‘감정의 찌꺼기들을 처리할 수 있는
만만한 자녀가 딸’이라는 두 가지 암시를 줍니다.
실제 주위의 모녀 관계들 또한
이 두 암시대로 나뉘는 듯합니다.
살가운 모녀 관계 그리고
처리되지 못한 감정의 찌꺼기들로 살갑지 못한 관계로 말이지요.
저는 저 두 암시를 수시로 넘나드는
위태로운 모녀 관계 속에 살아왔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모녀 관계는
평생 풀지 못할 숙제 이겠거니 하면서
아예 손을 놓은 채 방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이번 생에는 꼭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모녀간 주고받았던 상처들이
쉽게 저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두 모녀의 협소한 관계 속에서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이 타인이 속한 모녀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박사학위가 있고 육아 서적 많이 읽는 엄마라고
해서 꼭 자녀를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
까지도 말입니다.
모녀 관계 그 자체의 회복을 운운하기 이전에
‘엄마’라는 본질을 찬찬히 되짚어 봤습니다.
난생처음으로 말입니다..
'엄마’는 육아 이상의 다 방면의 책임이 따르는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자리입니다.
날 때부터 엄마가 아니라
어쩌다 엄마가 되었는데도 늘 엄마다워야 하는 자리, 자녀를 위해 매번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의 자리,
수시로 드러나는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완벽하지 못함 때문에 늘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영 부담스러운 자리 말입니다.
이것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엄마’라는 역할이 부여된 타인의 입장과 고통에
조금 민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내일 걱정을 미리 꾸어
기어코 오늘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엄마가 될 것이라면
예기된 불행을 피해 가고
계획된 유익을 미리 배치해 놓는
전략을 발휘하고 싶었습니다.
제 모녀 관계도 모자라 남의 모녀 관계까지
어깨너머로 훔쳐보고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 속에 뜻밖의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과거지향적인 자유 함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사연들과 이런저런 관계들을
직접 목격하면서 ‘엄마도 잘 몰랐었구나’, ‘어쩌면 그때 그것이 나름 엄마의 최선이었겠구나’ 하며
조금씩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엄마를 ‘내 엄마’ 이전에
‘나와는 다른 한 인격체’로 느끼려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내 친구 일 수 도 있었던 사람,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 ‘언니’라 부르며
지낼 수 도 있었던
완벽한 타인으로 보려 했습니다.
..
적절한 심리적 거리감을 두고 엄마를 바라보기가
여간해서 쉽지 않았습니다.
매번 엄마를 바라보면 ‘당연함’ 끼어들어
감정이입을 방해하는 바람에
‘당연하지 않음’을 통과해서 보려고
애를 써야 했으니까요.
‘당연하지 않고, 조금 낯 선..’
....
그 감성을 엄마를 향해 끄집어내기가
왜 그리 어려운 건지..
그만큼 엄마는 저에게 ‘또 다른 나’였나 봅니다.
집에 놀러 온 손님이 물을 쏟거나 컵을 깨뜨려도
얼마든지 용납하는 관대한 마음,
내 가족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다치진 않았는지 한 마디 건네는
약간의 무책임한 심정.. 등등
타인을 대했던 온갖 순간들을 떠올리며
그 속에 엄마를 대입시켰습니다.
그렇게 더 이상 ‘내 엄마’가 아닌
‘금주’씨라는 한 여인을
조금은 여유로운 심적 공간 속에 풀어주었습니다.
제 기대치를 충족시킬 의무가 전혀 없는 금주 씨는 모처럼 자유 해 보였습니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금주 씨’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굳이 나에게 매번 유익이 되지 않아도
금주 씨는 있는 자체만으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도된 타인으로서의 감정 이입 속에서
‘금주 씨’는 마냥 행복해 보였습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금주 씨는 대인관계가 두루두루 좋습니다.
금주 씨는 음식을 잘합니다.
얼굴이 예뻐서 탤런트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저와는 달리 운전을 잘합니다.
차를 좋아해서 다기 (차 그릇)를
모으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지러운 꼴은 못 봐서
정리 정돈을 늘 우선시 여깁니다.
금주 씨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철딱서니 없는 딸은 하나하나 토를 답니다.
금주 씨는 대인관계가 두루두루 좋습니다.
(나: “왜 남한테만 잘하는 거야!”)
금주 씨는 음식을 잘합니다.
(나: “엄마한테 뭐 만들어 달라고 하지?”)
얼굴이 예쁘게 생기셔서 탤런트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나: “나도 좀 더 이쁘게 낳아주지 그랬어!)
저와는 달리 운전을 잘합니다.
(나: “난 한국에서 운전 잘 못하는데 연수시켜줘!”)
차를 좋아해서 다기 (차 그릇)를
모으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 “저런 걸 왜 모으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어지러운 꼴은 못 봐서
정리 정돈을 늘 우선시 여깁니다.
(나: “아, 귀찮아, 좀 이따 엄마가 치워주겠지”)
‘나’라는 난봉꾼은 그녀의 그녀 됨에
일일이 토를 달며 내 뜻대로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녀의 장점을 ‘나’의 유익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음식을 해 주고 청소를 해주는
그녀의 봉사와 헌신마저 당연하게 여깁니다.
온통 나를 위한 무대 위 금주 씨를 ‘엄마’ 자리에
앉혀 놓고는 빚 받으러 온 것 마냥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도 ‘나’라는 이기적인 딸은 금주 씨에게
세상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감정 이입을 멈추니 금주 씨는 ‘명현이 엄마’라는
이름 없는 꽃으로 묵묵히 서있습니다.
이렇게 ‘엄마’는 자녀의 기대치와 필요를
늘 충족시켜야 한다는 무언의 암시 속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고 보면 엄마들은 바보인가 봅니다.
본인이 그런 우상 같은 존재가 아니란 것을,
그런 능력도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면서도
해달라는 대로 해 주지 못한 것에 자책하고
평생을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금주 씨 에게 단 한 번이라도
‘영원한 금주 씨 편’ 이 되어준 적이 있었는지
되짚어 봅니다.
..
이런저런 전자기기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도
가르쳐 달라던 엄마를 외면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달라 하라고
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혈기를 부리던 시절에는 독을 품은 말대꾸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엄마가 차마 남 에게 하소연할 수 없던 이야기들을 딸인 저에게 풀어놓았던 것인데..
저는 그때마다 말을 가로막고
엄마를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나름 최선을 다 했습니다.
지나 보니 다도, 거문고, 바리스타 자격증 등등
하고 싶은 건 열정적으로 배우는 엄마를
본받고 자랐기에 저 또한
늘 새로운 도전을 일 삼아 왔습니다.
집안의 크고 작은 문제도 말없이
혼자 감당하고 계셨기에
저는 뒤늦게 다 크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나중에 저 같은 딸 낳고 고생할까 봐
일찍이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습니다.
모든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복될 때
자신이 원하는 상대의 행동을 이행해내는 것입니다. 똑같이 앙갚음을 해 주는 대신에
왠지 손해 보는 느낌을 기어이 감내하고
자신이 원하는 상대의 반응을
그대로 구현해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이 고비를 넘지 못합니다.
혼자 노력해서 손해보고 억울할 거 같아
기어이 똑같은 처세를 하고는
상처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운운하기보다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겨내려 합니다.
그전에 사랑에 수반되는 부수적인 것들을
감내할 인격을 갖추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제야 잘 다듬어져 상대를 찌르지 않는
‘진짜 사랑’을 줄 수 있으니까요.
엄마를 사랑하기 위한 다소 구체적인
7가지 계획을 나눕니다.
1. 함부로 ‘부적격’의 낙인을 찍지 않을 것
2. 나 자신의 옳음을 엄마를 비난하여
확인하지 않을 것
3.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고 관대할 것
4. 미움과 연민을 수 없이 오가다가도
애틋함의 자리로 돌아올 것
5. 논리와 이해가 설 자리가 없는 곳에서도
묵묵히 서 있을 것
6. 상처가 앙심이 되어 응징을 하다가도
마음을 고쳐 먹을 것
7. 가끔은 틀리고 내 맘에 안 들어도
기어이 품을 것
현금과 선물을 갖다 바치고 이벤트를 열어주는 것은 오히려 쉬운 축에 속합니다.
돈 안 드는 저 일곱 가지가
어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모녀 관계는 어떤가요?
이 세상에 모녀 관계 치고
사연 없는 관계가 어디 있겠어요.
이 인류 역사가 끝날 때 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고질적인 현상이니 너무 자책하거나
용기를 잃지 마세요.
사랑에도 현명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인생에 있어 의미 있는 성장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