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한가위 명절이 다가왔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학창 시절을 보냈었고 부모님이 계신다. 부산 경상도 억양과 사투리가 몸에 여전히 붙어 있다. 처가도 본가와 차로 15분 정도거리라 분기에 한 번 이상 부산으로 향한다. 근래 장모님이 편찮아 아내는 연속으로 금요일 퇴근하고 부산에 가서 병시중하다가 주일에 올라온다. 아내는 올해 추석 연휴에는 내려가지 않고 다음 주말에 가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일정을 조정하여 이번 명절은 홀로 추석 전 일찌감치 명절치레를 하기로 했다.
부산은 내가 자란 집이고 부모님이 계신 곳이지만 언젠가부터 의례적인 나들이고 언제 출발하고 언제 돌아올 것인가가 큰 관심사다. 주객이 바뀌었다. 예매한 왕복 열차를 가족 카톡에 올리면서 2박 3일 일정이 정해졌다. 보통 명절 전날 가서 명절날 저녁 늦게 올라오곤 했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새벽 열차 속에서 부산에서 일정을 잠시 상상한다. 명절 전이라 친구에게 연락해서 얼굴이나 볼까, 부산 둘레길(갈맷길) 구간을 걸어볼까, 정하지는 못하고 나름 행복한 여유를 가진다. 대구역을 지나면서 기차 좌석에 비치된 잡지를 열어본다. 부산 동구 여행안내 특집기사가 있다. 부산역 바로 앞인데 10여 곳을 소개한 내용이다. 부산역에 도착하면 오전 9시 전후다. 본가에 이렇게 일찍 안 가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이곳을 둘러보기로 마음을 먹고 급히 움직이는 코스를 정해 본다.
요즈음 나는 근현대사 문화유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산항은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맺으면서 개항(1876년) 하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15세기부터 왜구의 무단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왜인의 출입과 상업을 허용한 구역이 역 근처 초량왜관 구역이었다. 부산역에 메인 출입구 반대편을 보면 바다와 배, 항구가 바로 눈앞에 들어온다. 그 당시에는 여느 어촌과 같이 이곳은 푸른 소나무와 모래사장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방문지는 역 맞은편에 있는 남선창고 터이다. 함경도에서 배로 물건을 싣고 와서 보관하던 최초의 물류창고지다. 1900년에 지어졌는 데 지금은 벽 흔적만 남겨두고 있다. 근처에 붉은 벽돌 4층 구 백제병원 건물은 온전히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졌는데 이름과 같이 개인 종합병원에 시작하여 중국요릿집, 장교 숙소, 전쟁 중에는 치안사령부로 용도를 변경하며 지금은 브란운핸즈라는 카페와 책을 읽을 수 있는 창비(창작과 비평)사 복합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관뿐 아니라 내부에서도 지난 온 과거가 읽힌다.
(구) 백제병원: 브라운핸즈, 창비부산
옆 골목을 들어서면 차이나타운이다. 개항기에 이곳에 청국 조계지가 설치되고 영사관, 상점, 집들 들어서고 청관거리에는 포목, 비단 등을 수입해서 파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빨간색 홍등으로 치장한 중국요리 식당들이 즐비하다. 거리 중간에 '초량근대 역사 갤러리'가 있는데 한자리에서 한 눈으로 사진을 통해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 초량근대 역사 기념관
바로 옆에는 'WELCOME TEXAS STREET' 아치가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미군이 주둔하였고 이 청관거리는 군인을 상대로 한 술집, 점포가 들어서게 된다. 그때부터 이곳을 텍사스 스트리트라 불리게 되었다. 요즈음에는 러시안과 동남아 사람들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 흐름과 같이 일본인, 중국인에서 미국인 그리고 러시아, 동남아인으로 그 주체가 바뀌고 있다.
TEXAS STREET
다음으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초량교회 역사관으로 향했다. 초량교회는 개항시점에 선교사가 세운 교회로 한강 이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교회이다. 역사관에 들어서니 계단 복도에 미국, 호주에서 한 달 이상 배를 타고 부산항에 도착하여 인천 등으로 이동한 선교사들의 행적을 게시해 있다. 역사관은 미리예약을 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끝으로 부산 수정동 일본식 가옥인 문화공감 수정으로 갔다. 나는 자랄 때 영도에서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들을 보았고 살기도 했었다. 나무 마루 복도, 2층 나무 계단, 다다미방 등은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이 집은 정원, 방 구조, 개수, 크기 등으로 일제강점기 때 고급 주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장군의 아들등 영화 촬영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문화공감 수정
우연히 부산역 주변을 걸으면서 근대사의 흔적을 잠시 살펴보았다. 올해는 한여름 추석이다. 더위로 오전이지만 더 이상 움직이기는 쉽지 않아 멈추었다. 초량 이바구길(이야기 경상도 사투리)을 따라 부산의 특징인 산복도로 올라가는 168 계단과 부산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김민부(시인) 전망대, 청마 유치환 선생의 우체통 등은 남겨두었다. 부산역에 내리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생겨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