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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May 28. 2021

지구 멸망 이후 최초의 코카콜라

베트남 요리와 여행 이야기-3

 후에 여행자 거리 중간에 있는 식당인 마담 뚜. 어젯밤의 술친구들과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해장국처럼 쌀국수를 후루룩 마셨다. 스프링롤을 땅콩 소스에 찍으며 마리앤이 물었다. 

 "오늘은 뭐 할 건데?"

 "난 오늘 밤 기차 타고 다낭으로 내려가. 너는?"

 "어, 나도 오늘 밤에 하노이로 돌아가는데. 그전에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가보려고. 혹시 너네 후에 워터파크라고 들어봤어?"

 마리앤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사진을 보여주며 워터파크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원래 워터파크로 지은 곳인데, 재정난으로 몇 년 전 문을 닫은 곳이야. 그다음부터는 관리를 안 해서 폐허처럼 버려졌고. 놀이공원은 폐장했지만 사유지라서 입장은 불가능하다고 써있네. 근데 밑에 또 관리인한테 슬쩍 팁이라며 뇌물을 찔러주면 들어가게 해 준다는 말도 있고. 한번 가 볼래? 후에에 오면 꼭 가보고 싶었어."

 "그래, 밥만 다 먹고 한번 가보지 뭐."

 나와 필립, 에밀의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 타고 워터파크의 정문 앞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자마자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노 엔터, 고우 백"

 우리는 돈을 주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으나 그의 태도는 여전히 완강했다. 일단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아니 왜 안 들여보내 주냐"

 "혹시 돈부터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니야?"

 "잠깐만, 내가 다시 찾아봤는데 정문 말고 산길로 돌아서 공원 안으로 몰래 들어가는 길이 있대. 그쪽으로 들어가서 내부 관리인한테 뒷돈을 찔러줘야 된다네."

 "뭐야, 정문은 씨씨티비라도 있어서 안 들여보내 주는 척하는 건가. 그거도 웃기네."

 마리앤의 새로운 정보에 따라 우리는 샛길로 빠져 산을 올랐다. 우리 말고도 이 루트를 많이들 이용하는지 풀숲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는 개구멍 같은 입구를 발견했다.



 "5만 동"

개구멍을 통해 공원 안으로 들어선 우리를 보고 어디선가 경비원인듯한 남자가 다가왔다. 우리는 잠깐 움찔했지만, 이내 이천 원 남짓한 돈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입장료도 해결됐겠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버려진 놀이공원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2004년 개장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이곳은 10년 이상 버려진 채 방치됐고, 그동안 호기심과 모험심에 몰래 찾아온 손님들이 남긴 낙서와 쓰레기들이 공원을 가득 뒤덮고 있었다. 우리는 공원의 한가운데 있는 용 전망대로 향했다. 물론 지도 같은 건 없고, 녹슬고 빛바랜 표지판을 통해 겨우 길을 찾아야 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우리는 용의 식도를 역류해 올라갔다. 이빨 사이로 공원을 둘러싼 울창한 숲이 보였다. 우리는 송곳니가 드리우는 그늘에 앉아 30도를 훌쩍 넘긴 오늘 날씨에 물을 충분히 챙겨 오지 않은 스스로의 멍청함을 탓했다. 


 

 "이거라도 먹을래?"

 에밀이 가방에서 붉은빛의 용과를 꺼냈다. 이 시점에 가방에서 등장하기에는 너무 뜬금없는 물건이었다. 우리는 의아한 눈길로 에밀을 바라봤다. 그는 이내 주머니칼을 꺼내 과일을 썰기 시작했다. 키위 같은 식감이지만 코코넛 같은 맹숭한 맛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과일이지만 목이 너무 말랐던 나는 반을 자른 용과를 받아 들었다. 하얀 과육 속에는 씨앗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가방에서 데워진 용과는 미지근하면서 달짝지근했다. 과즙이 흘러내려 손이 끈적해졌지만, 팔목을 타고 내려오는 과즙을 핥으며 우리는 맛있게 과일을 먹었다. 

 "용의 입안에서 용의 과일을 먹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지."

 필립의 실없는 농담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 살아남은 지구 최후의 4인이 된 듯한 상황에 몰입하며 우리는 꽤 오랜 시간 워터파크를 '탐험'했다. 하지만 이미 트립어드바이저에도 올라와 있을 만큼 비밀스러운 장소는 아니기에, 건너편에서 다른 무리의 구경꾼들이 지나가면 우리의 몰입은 김이 팍 새곤 했다. 

 "그래, 그들은 단지 좀비야. 지금 배가 불러 우리를 해칠 생각이 없는."

 필립의 설명에 배부른 좀비는 과연 사람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에게 맞춰주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도 워터파크에 가본 적은 손에 꼽을 수 있다. 높은 곳과 빠른 것을 둘 다 싫어하는데, 워터파크의 꽃인 슬라이드는 높은 곳에서 빨리 떨어지기 때문에 나와는 상극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곳의 슬라이드에는 물이 없다. 바짝 마른 놀이기구는 이미 웃자란 나무들로 덮여 있었다. 

 "내가 먼저 갈 테니까 안 부서지면 너희도 따라와. 어때?"

 필립은 이 말을 하고 성큼성큼 지저분한 미끄럼틀 위로 올라갔다. 오래된 플라스틱은 올라가면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만큼 부실해 보였지만, 흔들리기만 할 뿐 부서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필립이 무사히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뒤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뒤를 쫓아 발걸음을 내디뎠다. 

  

 

 출구를 찾던 중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우리는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간이매점을 하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콜라와 맥주를 팔고 있었다. 커다란 세계관 충돌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만의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바로 빠져나와 매점에서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 서늘한 탄산이 목구멍을 때리며 내려갔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리워질 맛이었다. 영화 '좀비랜드'의 좀비들의 세상에서 마지막 트윙키를 찾아 헤매던 우디 해럴슨이 떠올랐다. 나도 지구가 진짜 멸망하기 전에 콜라를 하나 쟁여둬야겠다.  

 우리는 콜라를 마시며 여유롭게 폐허의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들어갈 때는 제지하던 경비원들이 나오는 우리를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택시를 불러 후에 시내로 돌아온 뒤 우리는 헤어졌다. 마리앤은 하노이로, 에밀은 닌빈으로, 필립은 누나를 기다리며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문다고 했다. 


 호스텔에 맡겨둔 짐을 찾았다. 며칠 새 얼굴을 익힌 스탭이 마지막으로 캐모마일 차를 타 줬다. 기차역까지는 걸어서 40분 정도 거리라 내가 왔던 날과 같이 걸어가기로 했다. 저녁이 됐지만 공기는 여전히 텁텁했고, 도로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식지를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밤이 되면 거리로 나와 도로변에서 술을 마신다. 어젯밤 내가 그랬듯, 오늘 밤의 재미를 쫓기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다낭으로 떠나는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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