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어린이들은 충분히 놀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어린이들과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노동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많은 소년 소녀들은 18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많은 노동을 해야만 한다. 이들에게는 노동이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부모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놀이일지도 모른다.
서머힐은 놀이를 가장 중요시 하는 학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놀이라고 하는 것은 스포츠나 규칙이 있는 놀이가 아니라, 어린이들이 환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아무런 구속이 없는 놀이를 말한다. 규칙이 있는 놀이는 숙련과 함께 활동 또는 경쟁 등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의 놀이에는 숙련도 필요 없고 활동할 필요도 없다. 또 경쟁이 붙는 일도 드물다.
서머힐에서는 여섯 살의 어린이들이 하루 종일 그들의 환상대로 놀도록 내버려둔다. 이 어린이들에게는 현실과 환상이 밀착되어 있다. 열 살짜리 사내아이가 유령으로 변장하면 다른 아이들이 기뻐서 함성을 지른다. 그들은 물론 그 유령이 토미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침대보를 뒤집어 썼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토미가 덤벼들면 그들은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어린이들은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들의 환상을 행동으로 옮긴다. 여덟 살에서 열네 살까지의 어린이들은 갱놀이를 하거나,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딱총을 겨누거나, 또는 나무로 만든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로 높게 떠다닌다.
내 생각에는 어린이들이 그들의 환상을 실제의 현실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해심이 부족한 어른이 그들을 방해하며 그 모든 짓들이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쿵 하며 현실 속으로 떨어지게 된다. 현명한 부모는 어린이의 환상을 무시해 버리지 않을 것이다.
현대문명의 병폐는 어린이들을 자유롭게 놀지 못하도록 하는 데서 생긴 결과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모든 어린이들은 진정한 어른이 되기도 전에 이미 어른으로 길들여지고 만다. 어른이 어린이의 놀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는 원인은 불안 때문이다. 어린이의 장래를 위한 어른의 걱정이 어린이의 놀 권리를 빼앗도록 잘못 인도하고 있다.
자신의 소년 시절을 이제 더 이상 기억할 수 없고, 그 때 스스로 만족스럽게 놀 지도,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볼 수도 없었던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놀 능력을 상실한 어린이는 영혼이 죽은 것이며, 그가 사귀는 다른 어린이들에게는 위험이 된다.
서머힐에서 노동에 대한 니일의 생각을 만난 때문이었을까? 어린이들의 노동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지 않은 채 수 십년 교단에 서 있었다. 오십이 다 되어가던 날에 윤구병 선생님이 변산공동체를 만들고, 변산공동체학교에서 삶과 노동과 교육이 하나 됨을 가르치는 모습을 『변산공동체학교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서 읽었을 때에도 가슴이 크게 뛰지 않았다. 그러다가 3년 전에 비노바 바베가 쓴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비폭력 교육혁명가 비노바 바베의 배움과 삶, 교육 이야기』를 읽으면서야 삶과 배움이 일치되는 교육으로서 노동에 관한 생각에 동의할 수 있었고 변산공동체학교를 뛰는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서머힐처럼 어린이들에게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놀이를 통한 성장을 기대하면서 노동에 대한 의미를 재껴두는 것이 옳은 것인가, 삶과 노동과 교육이 일치를 이루는 ‘삶을 위한 교육’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는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서머힐에서 니일은 ‘노동’을 어린이들의 활동에 따른 경제적 보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한 노동은 배제해야할 필요가 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밭에 나가 일을 하면 30페니의 급료를 제공하고 그렇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그 두 배를 지불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활동을 중단한 것에 동의한다.
놀이를 억압당하여 정신이 병든 한국의 어린이, 청소년의 모습은 너무도 흔하게 본다. 어린이들은 충분히 놀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서머힐의 가치에 공감을 한다. 동시에 서머힐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노동의 형태, 이를테면 목공, 철공 작업과 같은 것들의 체험들을 통해서 그들이 필요한 자전거보관대 등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삶과 연결된 ‘노동’의 가치를 배우는 활동이다. 비노바 바베는 하루의 두 시간 정도는 어린이들이 생산적인 활동인 농사, 옷을 짜는 방법 등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성인이 되어서야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삶과 연결된 공부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의 학교에서도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체험 활동으로서 노작교육은 꼭 필요하다. 텃밭에 채소를 길러내고, 식재료로서 닭이나 돼지를 키우고, 벼를 심어서 추수를 하고, 건물을 짓고, 구들을 깔아보고, 누에를 길러 실을 만들어 천을 만들어보고, 콩을 길러 수확하여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가보고, 나무를 다듬어 생활에 필요한 가구들을 만드는 활동들은 교육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 활동을 통해서 자본이 지배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마주하여 현재의 문제들에 대하여 토론하면서 답을 구해 미래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다.
한국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놀이가 절대부족하다. 손에 쥐어준 스마트폰의 영상, 게임으로 인해서 뇌에 혼란을 겪으며,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성적 올리기에 내몰리고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서로 어울려 놀이를 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있다. 매년 교육부에서 ‘학생정서행동특성검사’를 실시하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충분한 놀이를 경험하지 못하는 현실은 고칠 엄두를 못내고 당장에 나타나고 있는 병리적 현상만을 발견하여 대응하려는 헛발질에 지나지 않는다. 2017년에 실시한 학생 정서행동특성 검사의 결과를 보면 조사대상 중학생 453,793명 중 2%인 9,009명이 자살위험이라고 하였다. 100명의 중학생 중에 2명은 자살 위험이 있는 한국의 중학교가 정상일까? 부모가 동의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학교가 있다면 아이들은 공부할 준비가 되었다고 스스로 자각할 때까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놀이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고, 그 성장에 바탕하여 공부가 시작되었을 때 놀라운 속도로 그들에게 필요한 공부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나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 집에서 50분 정도 걸어서 학교에 오가는 동안에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학교에 다녔고, 쉬는 시간에도 전혀 빈부의 차이가 보이지 드러나지 않는 검거나 하얀 교복을 입고 맘껏 뛰고 떠들면서 어울렸다.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어떤 날은 밤 아홉시가 넘어서까지 학교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중학생 시절을 보내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더는 놀 친구들도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누나는 생계를 위해서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누나는 2교대로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나는 혼자였고, 공부하는 모습을 볼 사람도,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년 반 정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도 모르는 채, 담임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교사가 될 수 있는 학교에 가서 교사가 되었다. 대학을 선택할 때에는 나의 꿈, 나의 진로 계획에 따른 학과, 대학 선택을 하지 못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의 꿈, 나의 진로에 대하여 어떠한 조언도 상담도 듣지 못하였다. 다행히도 대학을 졸업하고 갖게 된 직업이 나한테 잘 어울렸다. 36년의 시간을 다행히 잘 어울리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