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제타; 다급하게 문을 열고 작업장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거칠게 여닫는 소리. 물건이 부딪히는 소음과 발소리. 로제타, 고함을 치며.
영화에는 여러 번 로제타가 문을 열고 닫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문 안쪽은 일상의 삶이 보장되는 사람들의 공간이고 로제타는 그런 사람들 바깥에 존재한다. 닫힌 세계 안으로 로제타가 들어가는 방법은 쉽지 않다.
오프닝에서 로제타는 느닷없이 문을 열고 자신을 해고한 관리자를 향해 소리친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인과관계의 일반적 서사를 택하지 않는다. 감정이 폭발하는 결과를 먼저 제시하고 사건의 원인을 뒤에 배치해 소녀가 평범한 세계에 침입하고 충돌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재구성한다.
로제타와 그들의 세상은 넓고 위험한 도로로 분리되어 있다. 그곳에 닿기 위해선 고난의 영웅담이 흔히 그러듯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 우선 트레일러가 있는 숲에서 위험하게 차가 달리는 도로를 건너야 한다. 막막한 도로는 일터와 로제타의 경계다. 길을 건너서도 간단치 않다. 그녀는 무시로 안정된 세계의 문을 열 때 겪던 거절의 학습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침투 순간을 시시각각 엿본다.
그녀가 주류에서 밀려난 숲은 물과 식량 같은 최소의 삶도 보장받지 못하는 불안한 세계다. 이곳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큰 구덩이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에서 더 깊은 늪을 경험한다. 견디기 위해 장화를 갈아 신고 가난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 틈을 휴지로 틀어막는다. 여기서도 문을 닫는 행위가 강조된다. 당장 트레일러 밖의 관리인, 알코올을 사려 몸을 파는 엄마의 탈출을 막아야 한다. 리케를 밀고하고 얻은 와플 가판대에서 로제타가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업무도 문단속이다. 어렵게 차지한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크고 무거운 걸쇠와 자물쇠로 트럭을 굳게 잠근다.
영화에 드러난 심각한 청년 실업 문제는 의자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벌이는 자리 뺏기 게임과 같다. 첫 장면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당한 로제타는 와플 공장 사장을 졸라 새 일을 얻는다. 그 자리는 비슷한 처지의 어느 엄마의 일터였고 로제타도 사장 아들에게 그 일을 다시 뺏기게 된다. 갈 곳 없는 로제타는 결국 도움을 준 리케의 거짓을 사장에게 이르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리케의 해고를 그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호의를 배신한 로제타의 마음이 편치 않다.
호수에 빠진 리케를 구하려 망설일 때, 엄마의 매춘을 단호하게 차단할 때, 어렵게 얻은 리케의 자리를 포기할 때, 카메라가 응시하는 로제타의 무표정한 얼굴은 일상화된 아픔이다.
#2
카메라의 위치 , 관객과의 거리
가장 성공적인 카메라 위치는 관객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할 때일 것이다. 하지만 로제타의 카메라는 배우와 가장 근접한 곳에서 그녀의 동선을 추적한다. 돌진하는 인물에 밀착해 사실적 다큐를 넘어 전장의 다급한 순간처럼 심하게 흔들린다. 불안정한 카메라는 쉴 틈 없이 일자리를 찾아 달리는 소녀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대사가 적은 영화에서 로제타의 마음을 읽는 방법은 소리다. 거친 호흡과 발소리, 난폭한 오토바이 굉음 같은 음향은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렌즈는 로제타가 움직일 때 정면이 아닌 측면 더 많은 경우는 뒷모습을 보여 준다. 의도된 카메라의 위치는 일상을 함께 체험하며 그녀의 현실에 다가가는 효과를 준다.
배우와 카메라의 거리와 달리 다르덴의 태도는 인물의 상황을 일정한 거리에서 관조한다. 섣불리 다가가 가난을 관음 하거나 전시하지 않고 뜨거운 분노와 쉬운 해결을 차단한다. 사회적 약자에게 사려 깊은 시선을 견지하며 필터 없는 현실을 제시하고 인물의 윤리적 갈등을 현재로 끌고 와 고민하게 만든다,
#3
소년의 역할
로제타에게 리케는 친구 역할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소년은 소외된 로제타에게 손을 내밀어 세상 안으로 이끈다. 초대에 주저하던 로제타는 어설픈 춤을 추며 어울리는 법을 배우고 그의 미숙한 드럼 소리는 다른 악기와 어우러져 그럴싸한 합주가 된다. 친구가 다가와도 여전히 로리타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다. 깊은 밤, 리케와 등을 지고 누운 로리타는 마음속의 나를 불러내 조용히 위로한다.
(친구) 넌 평범한 삶을 산다.
로제타 난 평범한 삶을 산다.
(친구) 넌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로제타 난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 거야.
흔들리는 영상이 인상적인 영화에서 주목할 순간은 도리어 로제타의 얼굴을 가만히 클로즈업할 때다. 숨 가쁘게 달리던 카메라가 멈추고 로제타가 숨을 고를 때 우리는 질문한다. 리케처럼 늪에 빠지고 일자리를 위협받을 때 즉, 로제타가 우리와 충돌할 때 나는 어떡할까. 선의를 베풀던 나의 생존이 위험해질 때 당신의 선택을 다르덴은 물어본다.
주위의 정당하지 않은 도움의 거절은 자존심을 지키려는 로제타의 안간힘이다. 그 힘겨운 노력은 위기에 처한 한 인간의 존엄을 드러낸다. 와플 가게를 그만둔다는 전화 후 로제타는 자신을 괴롭히는 오토바이 소리가 다가오자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에겐 우는 것이 웃음보다 더욱 어렵다. 울음을 삼킨 로제타를 향하던 카메라는 지금까지의 위치를 이탈해 소년의 자리로 이동한다. 그리고 암전.
쉼 없이 움직이던 카메라가 위치를 이동해 멈추는 라스트에서 다르덴의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로제타에게 다가가던 소년은 관객이고 나와 당신이다. 소녀의 삶을 지켜보던 관객, 이제 당신이라면, 무거운 가스통 같은 현실과 씨름하다 넘어진 로제타를 위해 당신이라면. 이어질 다음 씬의 선택은 내 몫이 된다.
리케는 로제타가 웅덩이를 건널 때 필요한 장화를 선물한다. 장화는 웅덩이의 탈출을 크게 돕지 못한다. 그저 이전의 낡은 장화보다 오물을 덜 묻히고 좀 더 깊은 곳에서 자유를 얻을 뿐이다. 호수에 빠졌을 때 로제타는 스스로 헤엄쳐 나왔고 소년을 호수에서 도운 것은 로제 타이다. 고된 삶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서로의 연대는 웅덩이를 빠져나올 지렛대로 충분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