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빨라 호수, 뜰라께빠께, 과달라하라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는 또 화들짝 놀라 버렸다. 어제 호텔 앞에서 만났던 경찰들이 하필이면 우리 방 앞에서 집합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저런 거엔 절대 적응 못할 거야. 서둘러 창문을 다시 닫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오늘은 이모의 친구와 만나 함께 과달라하라에 가기로 한 날이다. 그전에 먼저 이곳에서 가까운 차빨라(차팔라) 호수에 가기로 했다.
차빨라 호수에 들리고 점심 즈음에 과달라하라에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아침밥은 대충 집에서 챙겨 온 컵라면으로 때웠고, 호텔 앞 편의점에서 커피를 한잔 사고는 다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 조금 안되게 달렸을까, 드디어 차빨라 호수에 도착했다. 차빨라 호수는 이곳 멕시코에서 가장 큰 호수로, 길이가 21km에 달한다. 호수 위에는 이름 모를 새들이 뭐라도 주어먹기 위해 관광객들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오늘은 날이 흐리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그런지 호수 근처에 있는 식당과 노점상들이 전부 닫혀있다. 그래서 그런지, 왠지 더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깐, 조금만 걷다 보면 금세 호객꾼들이 다가온다. 보트 타기 같은 것은 평소라면 관심도 없었겠지만, 초등학생인 사촌 동생에게는 딱이었다. 마침 합류하기로 한 이모 친구도 예상보다 일찍 출발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했다. 이모 친구의 아들 역시 사촌과 동갑내기란다. 해서 이모는 다 같이 보트를 타고 놀면 좋겠다며 보트꾼의 번호를 받아 두었다.
따라서 우리는 합류하기 전까지 호수 근처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마침 바로 앞에 성당이 하나 있어 그곳에 앉아 있었는데, 이모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앞에서 사고가 나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으니 호수에는 못 갈 것 같다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차빨라 호수 근처의 마을 하나만 더 둘러보고 떠나기로 했다. 차빨라 호수에서 차로 10분만 가면 아히힉 마을이라는 곳이 나온다. 차빨라 호수가 워낙 크기 때문에, 아히힉 마을에서도 역시 호수를 구경할 수 있다. 차빨라 호숫가는 식당과 호객꾼들이 많아서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 있다. 그렇지만 아히힉 마을의 호숫가는 공원 하나가 전부다. 대신 호수 구경을 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한적함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 그곳 벤치에 앉아서 호수를 바라보며 쉬었다.
차빨라호수는 정말 넓고 크다 보니 호수라기보다는 오히려 바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곳에서 좀 더 쉬었다 가고 싶었지만, 갑자기 떨어지는 빗방울에 서둘러 다시 차에 타야만 했다. 보트 안 타길 잘했네.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과달라하라 근처에는 뜰라께빠께라는 수공예품으로 유명한 거리가 있다. 이곳 멕시코의 예술가들의 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이란다. 우리가 한참 여행을 하고 있을 시기는 마침 dia de muerto(죽은 자의 날) 시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 곳곳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었다. 각종 임시 부스들에서는 페이스 페인팅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공예 체험 등이 진행된다.
한참을 구경하고 있을 때쯤, 다시 이모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다행히 정체구간을 빠져나왔으니, 이곳에서 만나 점심을 먹자 하셨다. 우여곡절 끝에 합류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에 만나 마땅한 식당을 찾기에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바로 앞에 보이는 아무 큰 식당으로 들어갔다.
알고 보니 그곳은 하나의 식당이 아닌, 여러 식당을 모아둔 몰과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오히려 너무 많은 선택지에 어디를 가야 할지 다시 고민해야만 했다. 그러다 어느 가족들이 먹고 있는 플레터가 맛있어 보여 바로 옆에 따라 앉았는데, 서로 다른 식당이었다. 이곳은 식탁보 색깔로 식당들이 나눠지는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그곳 식당의 플레터와 웨이터가 추천한 술을 한잔 시켰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식당은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한 번만 팔고 마는 식당인가 보다. 음식들은 비싼 편이데 제값을 못하는 맛이다. 아이들이 시킨 주스는 분말주스가 나오고, 술은 넓은 항아리에 데낄라 한잔 섞는 것이 전부였다. 워낙 큰 그릇에 한잔이 섞인 거라 술이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바쁘게 달려, 오후 4시경 즈음, 드디어 과달라하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과달라하라에 들어오니, 멕시코의 시내가 얼마나 혼잡한 곳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있는 께레따로는 이곳에 비하면 시골이었나 보다. 과달라하라의 도로는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사거리에서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차들 때문에 우리는 결국 신호 한 번을 그대로 보내야만 했다.
일전에 마르셀라 아주머니께서 멕시코 시티의 교통의 혼잡함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잘 몰라서 한국의 서울 또한 그렇다며, 어딜 가나 시내는 운전하기 힘든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서울의 교통은 천국 수준이다. 제2의 도시인 과달라하라가 이렇게 복잡한데 과연 멕시코 시티는 어떨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워졌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주차장을 찾았다. 주차장이 타워식이라 입구에서 직원에게 열쇠를 맡기고 내려야만 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귀중품을 빼고, 다른 짐들도 눈에 잘 안 띄게 숨겨야 한다. 그리고 차를 찾을 때는 짐이 그대로 있는지 한 번씩 체크하고 타는 것이 필수다.
이모 친구는 시티버스를, 우리는 걸어서 투어를 하기를 원했기에 우리는 2시간 뒤에 만나기로 하고 갈라졌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바로 이 성당이었다. 멕시코에서 수많은 성당에 가봤지만, 이곳 과달라하라의 성당이 특히 좋았다. 규모도 규모이지만, 내부의 화려한 장식에 넋을 놓게 되었다. 성당 안에서 들리는 오르간 소리도 참 좋았다. 처음에는 성당에서 분위기를 위해 음악을 틀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위층에서 연주자가 직접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성당에서 나와서는 바로 앞에 있는 아무 박물관에나 들어갔다. 과달라하라는 시내에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어 도보로도 충분히 이곳저곳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이 한 곳에 모여있다.
그런데 박물관과 미술관은 전부 오후 5시면 문을 닫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뜰라께빠께에 오래 있었던 탓에 우리가 갈 수 있는 박물관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버스 투어를 할 것 그랬나.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광장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못내 아쉬웠던 이모가 늦게까지 여는 박물관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단 어린이들 놀이터에 가까운 곳이었다. 밀랍인형, 각종 미스터리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흥미가 떨어진 나는 이모와 동생이 보고 올 동안 쉬겠다며 근처 카페로 빠져나갔다.
2시간 뒤 다시 합류한 우리는 우선 호텔로 가서 짐을 먼저 풀기로 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경찰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건물이 하나 보였다. 물어보니 이 건물은 주정부 청사로 아직 관람할 수 있다고 했다.
청사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위와 같이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 속 남자는 미겔 이달고로,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란다. 멕시코 초등학교에서는 독립기념일이 가까워질 때면 저 사람이 나오는 연극을 한다. 따라서 이달고 머리 모양의 가발을 종종 산단다.
점심 식사를 한 식당 선택의 실패로, 저녁 식사는 이모 친구는 미리 프린트 해온 식당 리스트에서 고르기로 했다. 우리는 'Santo coyote'라는 멕시칸 음식점에 갔는데, 이 음식점은 내부가 매우 어둡다. 식당 내부에 있는 야외 홀에서 식사를 하는데, 식탁 위에 놓인 촛불이 조명의 거의 전부다.
나랑 이모는 이번에도 몰까헤떼(현무암 모양 절구에 나오는 살사와 타코의 속재료 모둠)와 미첼라다(토마토소스와 맥주를 섞은 음료)를 시켰다. sato coyote는 다른 멕시코 음식점에 비하면 가격이 꽤 나가는 편이다. 음식은 조금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고기를 시킨 사람들은 고기가 비리다며 후회했고, 연어와 새우등 해산물을 시킨 사람들은 대체로 만족했다.
식당의 조명이 전부 켜지고, 잠시 뒤,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식당에 들어와 공연을 하고 돈을 받는 마리아치들이 아닌, 이 식당에서 고용한 사람들이라 했다. 얼굴을 분장한 남녀 한쌍이 춤을 두세 곡 정도 추고는 퇴장한다. 식사가 끝나면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디저트 뷔페도 이용할 수 있다. 케이크, 푸딩, 크레페, 아이스크림 등등 다양하게 준비되어있다. 아마 이러한 공연과 디저트 뷔페 때문에 비싼 곳이지 않나 싶다. 분위기도 괜찮고, 공연도 보고 디저트 뷔페도 이용할 수 있어 인기가 많은 곳이란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제 우리는 께레따로, 이모 친구는 정 반대편인 어느 해안가로 가야만 한다. 서로 워낙 먼 곳에 살고 있었기에 그동안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마침 이번 여행지인 과달라하라가 딱 서로의 중간지점이었기에 이렇게 만날 수 있었다. 이모의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는 이모가 여간 반가웠던지, 호텔도 예약해주고, 점심에 저녁까지 계산했었다.
어제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사촌동생과 그 친구가 싸웠었다. 사촌이 울자 왜 친구를 울리냐며 혼내는 엄마에게는 아이는 '아니,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한국 친구라 반가워서 그랬지' 라며 넉살 좋게 넘어갔다. 바닷가에 살고 있는 이모 친구네는 특히 한국인들을 만나기 힘들다 했다.
서로 갈길이 먼 우리는 아침만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아침식사 역시 리스트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Boulangerie central라는 프랑스 빵집에 갔는데, 브런치로 유명한 곳이란다. 3층 정도 되는 제법 큰 규모의 카페였는데도 아침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먹고 나온 뒤에도 웨이팅을 하는 사람들로 가게 앞이 붐볐다.
커피랑 오믈렛을 시켰는데, 오믈렛은 너무 작고 내용물이 부실해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커피랑 빵은 맛있었다. 빵으로 유명한 집이라고 하니, 가게 된다면 다른 메뉴보다는 빵과 관련된 것으로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명한 집이라 그런지 직원들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만 쓴다. 가게 인테리어도 예쁘고, 분위기 또한 괜찮다.
우리는 가는 길에 차에서 먹을 빵을 한아름씩 사고, 그 길로 헤어졌다. 이제 보면 다음에 언제 만나지, 가는 길에서도 이모의 친구는 많이 아쉬운지 전화로도 작별인사를 하셨다. 돌아가는 내내 비가 내렸다. 국도를 달리는데 도로가 엉망이라, 이러다가 차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렇게 2박 3일 동안의 여행이 끝났다. 과달라하라의 시내를 많이 둘러보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쉽다. 다음에 또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