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에 갈 때는 항상 손에 커피를 테이크아웃해서 들고 간다. 아무리 손에 짐이 많고 가방이 무거워도 빼놓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거나, 물을 마신다거나 하는 것처럼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다. 나에게 < 커피 = 작업의 시작 >인 것이다. 실은 막상 커피를 들고 가도 한 모금 정도 마신 후에는 커피에 큰 관심이 없다. 전날 하고 간 작업을 다시 리마인드하고, 정말 작업을 시작할 준비들(기름 준비, 물감 정리, 아이디어스케치 확인 등)을 마치고 나면 그제야 커피가 다시 보인다.
오늘도 어김없이 커피를 사들고 작업실로 갔고, 작업실 도착 이후에 커피는 늘 그렇듯이 한동안 방치되어있었다. 그라운드 작업까지 마무리된 빈 캔버스에 스케치를 옮기는 동안 나는 커피를 어디에 두었는지 조차 잊고 있었다. 그러다 스케치를 끝내고 나서 새로운 캔버스를 짜기 위해 준비하던 중에 잊고 있었던 커피와 마주했다. 커피는 쏟아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책상에 놓여있었다. 책상 모서리 끄트머리에서 아슬아슬하게, 컵 아래 3mm 정도는 덜 걸쳐진 채로 위태롭게 있었다.
캔버스를 짜려다 잠시 멈추고 한동안 커피를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저 커피는 쏟아질까?’
‘쏟아지려고는 했을까?’
‘내가 혹시 지나가며 치진 않았을까?’
‘쳤다면 왜 아직 쏟아지지 않은 걸까?’
...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가 무관심하고 소홀해서 생기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에 대한 생각을 지나, 내가 작업할 때 즐기며 넣어두는 나만 아는 아슬아슬한 지점들에 대한 생각으로 넘어갔다.
경계_아슬아슬함의 카타르시스
언젠가 교수님께서 나에게 캔버스 위에서 대상과 대상 사이의 경계를 유보하고 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그 경계는 그려지는 대상과 배경 사이기도 하고 한 대상과 또 다른 대상의 사이기도 하다. 어쨌든 면과 면을 구분 짓는 그 경계를 뜻한다. 작업은 너무나 솔직해서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작업했는지 그대로 투영된다. 나의 경우에는 유독 작업이 솔직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다. 그래서 교수님께서 그 말을 했을 당시에 나는 굉장히 뜨끔했다.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눈에도 내가 경계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그대로 보였을 것이다. 특히나 나 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작업을 해오신 교수님의 눈에는 더욱더.
나는 면과 면 사이의 경계를 오랫동안 고민한다. 단순히 이 경계가 또렷해야 할지 혹은 흐려야 할지가 아니다. 경계를 어떻게 해결해야 뻔하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오랜 미술의 역사가 있었기에 이젠 정말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란 더 이상 없다며 창조를 회의적인 태도로 여길 때도 있지만, 결국 '창조'에 대한 욕심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뻔하지 않은 경계 처리를 위해 언제나 경계에 대해 고민한다.
나에게 있어서 경계는
너무 직선처럼 바르게 나아가서도 안되고,
너무 일정한 두께로 되어있어도 안된다.
가위나 칼로 오려낸 듯한 경계는 나에게 굉장히 스트레스를 주는 경계이다. 누군가는 이것이 깔끔해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경계가 지루하다. 너무 반듯한 나머지, 상상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듯한 경계선을 눈으로 따라갈 때,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지나가게 될 때, 어딘가 모를 아쉬움이 다가온다.
경계는 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변화가 있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