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졸업을 우당탕탕 끝내고 시간적 여유도 생겼겠다, 렌트비도 벌어야 겠다 싶어
미니잡 (월 45시간 이내의 초단시간 근로)을 알아봤다. 독일어에 자유롭지 못한 나는 영어, 요식업 위주의 옵션밖에 없었고, 베를린에서 english. Job을 구하는 사람은 차고 넘친다.
구직중 알게 된건 한국인으로서 한식당에 일하는게 나름의 니치 마켓이라는 거다. 한식당은 오너가 대부분 한국인이라 편한 업무지시를 위해 한국인을 고용한다. 물론 한식을 파는 곳이기에 한국사람이 일하는게 상징성이 있기도 하다. 반면 독일어를 못하는 미국인 친구는 30군데가 넘는 레스토랑 및 카페에 이력서를 돌렸지만 연락을 받지 못했다.
처음 일하게 된 곳은 코리안스타일 치킨 전문점이다. 이 곳은 베를린에서 5군데의 브랜치가 있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체인점이다. 한국인 매니저는 면접에서 프로베이션을 제안했다.
독일 노동법상 프로베이션(probezeit)은 수습기간이며 최대 6개월 제약을 두고 있다. 근무자 입장에서도 본인이 기대했던 잡인지, 회사 입장에서도 이 친구가 정식으로 현장에 투입이 가능한지를 해보기 위한 절차다.
그런데 대부분의 레스토랑과 카페는 이 프로베를 정식 계약을 체결하기 전 미리 근무를 하는 시간으로 이해되며 무급인 경우가 많다. 채용을 기다리는 구직자 입장에서는 굳이 프로베에 대한 대가를 요청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고, 만약 채용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3-4시간에 대한 대가에 대해 법적인 절차를 밟는 수고를 감수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어도 못하는 외노자 입장에서 독일의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는것은 사서 지뢰밭으로 뛰어드는 격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악용하는 레스토랑은 부지기수며 한번은 대규모 딜리버리 서비스 키친에서 4시간 정도 공짜 노동을 제공하여 그 대가로 샐러드를 받은적이 있다 ㅎㅎ프로베 이후 채용 여부에 대해 몇 차례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내가 일한 그 날은 특별 케이터링 서비스때문에 유난히 더 바쁜 날이었는데, 골치아프게 근로자를 채용하는 대신 이렇게 공짜 노동을 제공받는게 얼마나 편리한 방식인가.
일자리가 궁한 노동자는 실과 같은 희망을 품고 기회가 날때 마다 공짜 노동을 제공하러 다닌다. 학부 시절 요식업 알바를 몇번 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은 단순 서빙이나 주방에서 필요한 일을 도와 주는게 다였다. 반면 여기서는 조그만 주방에 어찌나 많은 시스템이 존재하던지, 잊고 있었던 육체 노동의 어려움과 서비스 종사자의 고됨을 단 몇 일만에 느끼게 되었다. 플러스로 해야하는 홀 청소와, 소스, 김치 채우기, 음료 채우기 쓰레기 비우기 등도 모두 카세가 담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하고 사과하는 걸 반복하다 보니 얼마나 내가 작은 버블에서만 살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아니면 20대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는 머리가 좀 컸다고 달리 느껴지는 걸까. 복잡 미묘한 감정을 우겨 넣고 이 주 정도를 일한 끝에 이제야 좀 시스템이 적응이 가나 할 즈음에 단체 챗팅방에 다음주스케줄표가 공유되었는데 내 이름이 빠져있었다.
마치 직장인이 자신의 책상이 사라져 있는 걸 모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몇 분 후 매니저에게서 개인 문자가 왔다. 다음주편한 시간대에 유니폼을 가지고 잠깐 와달라며 할얘기가 있다는 내용.
아 해고당하겠구나. 직감이 왔다.
난생 처음 당하는 해고에 얼얼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한 알바 였고, 몇 주 일한 곳도 아니었지만 적응하느라 스트레스는스트레스 대로 받고, 현실의 막막함에 차츰 적응하고 있던 차에 더 큰 한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내가 해고 당하러 가는 날에도 다른 한국인이 새로 면접을 보고 있었다
한국에서 숱한 해고 상담을 했었지만,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이야.
당연하지만, 내가 한국에서 써먹던 노동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외국인 노동자로서는 더욱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사실 한국이었어도 뭐 달랐겠나 싶기도 하다. 알바 쯤 그냥 새로 구하면 되지 굳이 상담을 받고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하는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밟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으로 해고라는것을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만약 이 미니잡에 내 생계가 달려 있고 당장 렌트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었을까. 경제적 이유 뿐만 아니라 해고는 사회적 단절, 고립으로 비춰지기도 해서 개인에게 상당한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긴다.
매번 해고 상담이나, 직장에서의 괴롭힘 및 임금 체불 상담 했던 의뢰인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분노, 슬픔, 절망 등 여러가지 감정이 담긴 그 얼굴들. 다시 노무사로서 의뢰인들을 만나게 된다면 그 표정들에서 지금의 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날은 하필 내 생일이었다!.. 당일 또 다른 노무사 친구와 나눈 카톡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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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뒤 비슷한 시기에 카페에 일하게 된 콜롬비아 변호사 친구도 해고 통보를 받았는데, 몇 시간의 공짜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라떼 한잔을 받았단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새로운 도넛 가게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며 최근 독일 최대 Gstronomy노동조합인 NGG의 멤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