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산역~도덕산
그 날은 겨울이었다.
나는 덥든, 춥든, 못 나가는 날씨가 아니지 않는 이상(폭우 등) 꼭 밖에 한 번은 나가는 습성이 있다.
방에 하루종일 있는 것은 나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체 공부는 어떻게 했나 몰라
마침 좀이 쑤시던 와중, 친구와 어디를 갈까 약속을 잡고 있었다.
지도를 쭉 둘러보다가 '출렁다리'라는 단어가 눈에 띠었다.
출렁다리에 대한 기억은 보통 좋았던 것 같다.
마장호수 출렁다리, 논산 탑정리 출렁다리, 소금강 출렁다리 등에 오르면 약간 무서운 기분이 들기도 하면서도 자연이 허락하지 않은 공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는 느낌에 기분이 묘하게 좋아진다.
동시에 풍경이 매우 멋있기 때문에 사진도 잘 나오고,
평소 모니터만 보다가 탁 트인 풍경을 보게 되면서 압도되는 감정도 든다.
물론 '인공폭포' 출렁다리라는 점이 좀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때, 평점이 짜기로 유명한 카카오 지도에서 4점을 넘었으면 괜찮겠지 하고 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맞이한 것은...
그... 기상이 안 좋았으면... 제가 거기까지 못 가지 않았을까요...?
사실 저 날은 일요일이었고, 월요일에 비가 엄청 온다고 예보가 내려진 상황이기는 했다.
아마 내가 가기 몇 시간 전에 가서 설치한 안내문이 아닐까...
좀 더 일찍 갔어야 했는데, 싶었다.
겨울이라 인공폭포는 가동을 하지 않고, 출렁다리도 폐쇄되었고.
아쉬운 마음을 가득 안고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넘어지면 안 되니까 하산 시에는 계속해서 바닥을 보게 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흙이 빨갛다.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수도권의 산 중 제일 빨갰다.
빨간 흙이면 산화철인가, 라고 고민하던 찰나
머릿속에 여정을 시작한 지하철역 이름이 철산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혹시 이 동네에 철이 나서 철산인가?
찾아보니 근처에 있는 광명동굴이 철광석을 캐던 동굴이 맞기는 한데, 철산의 지명은 쇠머리(소의 머리)에서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한 것 같았다.
그렇다기엔 철산의 철 한자가 쇠를 뜻하는 철이던데, 조금 관련이 있지 않을까?
나중에 토양 성분을 분석해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해당 지역이 진짜로 철 성분이 많은 지역인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잘 어울리는 이름을 가진 곳이라 느꼈던 장소 중 하나이다.
옛날 조상들의 지명은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는 왜 그런지 잘 감이 안 잡힐 때도 많고
때로는 촌스럽고 때로는 이상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곳저곳 걸어다니다보면 옛 지명이 참 잘 어울리는 곳이 많다고 느낀다.
요즘 다들 북한산이라 부르는 산은 고려시대 부터 천 년 정도 삼각산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오히려 북한산이라는 이름을 더 자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부터라는 이야기가 있다(정확한 사실관계는 더 알아봐야한다).
그런데 북한산을 한 번 가보면 아! 얘는 삼각산이네! 하는 생각이 딱 든다.
봉우리 3개가 뿅뿅뿅 솟아있기 때문이다.
7호선 역 중에 '마들'이라는 역이 있는데, 말을 들판에 풀어 키웠다는 썰이 있어서 마들이라고 한다.
실제로 걸어보면 평평하다.
나는 그 동네에 살았기에 모든 동네가 평평한 줄 알았는데 웬걸, 다른 지역은 고개가 굽이굽이 이어져 있어서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4호선 종점이 '당고개'였다.
어릴 때는 당고개라는 이름이 매우 생소했는데
불암산에서 잘못 하산하여 당고개역으로 내려온 다음에 바로 깨달았다.
다른 동네보다 무당집이나 점집을 뜻하는 백색, 홍색 깃발이 많이 꽂혀있었다.
무당이 많은 고개여서 당고개였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정말 조상님들은 지명을 잘 지었다.
걸어다니면서 어릴 때는 몰랐던 옛 지명이 왜 그런지 체험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나의 세상은 굉장히 휙휙 바뀌는데, 땅의 세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구나.
너무 빨리 변한다고 아쉬워했는데, 여전히 그대로인 것도 많구나.
어릴 적 친구들을 가끔 만나면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너는 참 그대로이구나', '너는 참 한결같구나'이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내가 세상에 못 따라가고 뒤쳐지고 있는 것인가 불안할 때도 많다.
그럴 때 이런 지명을 보면 왠지 모르게 반갑기도 하고, 약간은 겸허한 마음이 들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변한 듯 안 변했겠지, 안 변한 듯 변했겠지.
시간이 더 많이 흘러도 내 본질은 옛 지명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