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짐이라니. 바뀜이 아니라 번짐이라니. 목련꽃이 피는 일을, 꽃이 지고 열매를 맺는 일을, 계절의 순환을, 너와 나 사이 사랑과 이별의 시간을, 삶과 죽음이 돌고 도는 그 둥긂을, 시간과 공간의 옮김을 번짐이라고 부르다니. 먹물이 화선지에서 고요하게 번지듯이. 그리하여 번짐은 환함이라니.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나아가는 것이라니.” - 문태준
종이에 물이 번져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지요?투명한 유리잔에 파란 잉크 한 방울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셨는지요? 젖은 종이에 빨간 물감 한 방울 번져나가는 모습을 연상해보세요. 조용히 부드럽게 망설이듯 머뭇거리는 듯 미끄러져나가는 ‘번짐’ 봄이 번져 여름이 되고, 여름이 번져 가을이 되고 꽃이 번져 열매가 되고, 삶이 번져 죽음이 되는.
시인은 번짐에서 삶과 죽음과 자연의 섭리와 사랑을 봅니다. 네가 내게로 번져와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주 천천히 은연중에 내밀하게 번져옵니다. 번짐이 시작되면 막을 길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어쩌지 못하는 번짐입니다.
2008 3.18 산비
“‘슬로 리딩’을 통해 작가가 준비해둔 장치나 고안을 찾아내고, 때로는 작가의 의도 이상으로 흥미 깊은 내용을 찾아내는 ‘풍요로운 오독’을 해야 한다.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왜 이런 내용을 썼을까’ 의문을 갖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앞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는다. 중요한 구절을 만나면 책을 놓아두고 생각에 잠긴다. 밑줄과 표시를 하는 것도 방법이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책을 읽는 방법>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는 책을 절대 속독해서는 안 되며, slow reading 즉 지독(遲讀)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속독 후에 남는 것은 ‘단순히 읽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빨리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양보다 질을 우선하는 책 읽기를 추구해야 하겠습니다.
“아! 그 누가 나의 정신을 논리의 무거운 쇠사슬에서 해방시켜 줄 것인가? 나의 가장 솔직한 감동도 그것을 표현하려고만 하면 곧 거짓이 되어버린다.”
논리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합리는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인가요? 논리에 갇힌 정신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합리에 적응한 영혼은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논리는 때로는 나를 옥죄는 무거운 쇠사슬입니다. 천재들은 대게 논리적이지 않았습니다. ‘사랑’ 또한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무엇입니다. 내가 느낀 감동과 내 마음속 진심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여기에 논리의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오늘 새로운 아담이 되어 만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다. 이 강물은 나의 목마름이요, 이 작은 숲 그늘은 나의 잠이요, 이 벌거숭이 소년은 나의 욕망이니.” - 앙드레 지드
‘새로운 아담이 되어 이 세상 만물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것.’ 앙드레 지드의 감수성을 진하게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감수성이 충만하지 못하면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거듭나지 못하면, 이 세상은 삼백육십오일 그대로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내가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나면 이 우주는 늘 새로운 무엇으로 다가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그는 진정한 아담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경이롭고 아름답게만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위대성입니다.
2008 3.20 산비
“지금 나는 나의 과거로 인하여 온통 구속을 받고 있다. 오늘 어느 행동 하나도 어제의 나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 것이 없다. / 아!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나 자신에 대한 존중으로 인하여 내가 묶여 있는 이 구속의 저 너머로 도약하고만 싶다. 아! 닻을 올리고 그리하여 가장 무모한 모험을 향하여. / 그리고 그렇게 해도 내일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기를. 나의 정신은 이 ‘상관’이라는 말에 멈칫한다.”
“나는 더 이상 그냥 걷는 것은 싫다. 도약하고 싶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나의 과거를 밀어내고 부정하고 싶다. 더 이상 약속 같은 것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나는 너무 많은 약속을 한 것이다! 미래여, 나는 마음 변하면서 사랑하고 싶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금을 형성한 과거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과거의 허물에만 갇혀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뛰어오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도약하고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의 울림을 멈칫하게 하는 것은 ‘상관’입니다. 내 행동의 결과, 주위에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이 일이 다른 이에 연루되는 것은 아닐까? 이 ‘상관됨’이 싫어서 우리는 이미 약속된 윤리와 학습된 사회의 규칙에 따라 정해진 길로만 걷습니다.
전통은 옛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재현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신이 반영되고 거기에 적합한 형식을 새로 적용해야 진정한 전통이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변화함에 따라 변화하는 것, 그것이 전통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행위, 사랑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계성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합니다. ‘나는 마음 변하면서 사랑하고 싶다!’는 지드의 독백도 그런 뜻이 아닐까요?
민폐를 두려워하는 것도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됩니다. 때로는 파격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은 세상의 비난에 둔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일일이 세상에 대응하기보다는 무시하고 나가야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세상의 이목에 ‘상관’없이, 내 행색이 어떻든 구애받지 말고, 당당하게 내 갈 길을 달려갑시다.
2008 3.21 산비
“가장 감동적인 선은 가장 체념한 상태의 선이다.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신이 되는 것은 스스로 신성을 포기함으로써 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을 포기하고 가장 인간적인 길을 택함으로써 오히려 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습니다. 죽고자 하면 살게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가지게 되는 것, 삶의 모순이지만 그것이 삶의 진실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입니다. 우매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기 것을 움켜쥐고 절대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게 뭐라고? 그까지 것, 그게 뭔데?
‘버림’은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내려놓는 것과 수동적으로 포기하는 것. 궁지에 몰려서 어쩔 수 없이 내려놓기보다는 편안하게 기쁜 마음으로 놓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어제는 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슬라브 행진곡과 현을 위한 세레나데’,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2번이 연주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음악은 장중하고 구슬픈 맛이 있어 우리의 정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특별히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물이 구비치 듯 율동하는 선율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격정이 교차하면서 진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음악사에 관계된 책 몇 권을 구입만 해놓고서 읽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술에 대한 공부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음악에도 손을 대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되시기 바랍니다.
2008 3.22 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