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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cus Dec 06. 2018

몰입의 순간 : 송강호의 연기가 감동적인 이유

Dec 6, 2018 · 7 minute read · by Discus


송강호 주연의 <마약왕>이 곧 개봉하는군요. 송강호의 연기는 정말 대단하죠. 특히 <밀양>을 보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거의 모든 씬에서 다 감탄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번 <마약왕>에서의 연기도 무척 기대됩니다.


겸사겸사 송강호의 연기에 관해 쓸 말이 없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예전에 보았던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어요. 보그 코리아에서 송강호와 진행한 인터뷰였습니다.


잘 진행되던 인터뷰 중간에 갑자기 질문자가 현학적인 질문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정죄의 심판자적인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인터뷰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치는 질문을 하는데요. 송강호가 막아서며 대답합니다. 그런 어려운 건 내가 대답할 수 없어요. 어려운 생각은 연기에 도움이 안 돼요. 그러자 질문자가 물어봅니다. 그럼 어떤 생각이 도움이 되나요? 송강호가 대답해요. 생각을 안 하는 게 도움이 되죠.


생각을 안 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된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이런 말을 자신감 있게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배우 송강호는 이미 어떤 경지에 도달했음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몰입을 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영상은 기타리스트 존 스코필드(John Scofield)가 연주하는 순간입니다. 영혼의 파트너 베이시스트 스티브 스왈로우(Steve Swallow), 드러머 빌 스튜어트(Bill Stewart)와 함께 말이죠.


Bill Stewart, John Scofield, Steve Swallow - Everything I Love


무척 뛰어난 연주입니다. 그런데 연주도 좋지만 세 명의 표정이 어떤가요? 입은 힘없이 벌어져 있고 눈은 지그시 감겨있습니다. 눈썹이 우스꽝스럽게 움직이기도 하죠. 잘하면 침도 흘릴 것 같은데요. 그런데 사실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들이 우스운 표정을 지으며 연주하는 이유는 표정을 관리할 힘을 자발적으로 포기해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집중력은 연주를 위해 활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어요. 그들은 지금 몰입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영상을 보고 감동을 느껴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왜 감동적이지? 생각해보면 음정이 일정한 리듬에 따라 배열되어 있을 뿐인데 말이죠. 인간이 감동을 하는 특정한 리듬과 음정이 있는 것인가? 왜 저 영상을 보면 입을 따라 벌리게 되고 나도 모르게 박자를 타고 몸을 꿈틀거릴까.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모든 인간을 감동하게 할 어떤 궁극적인 멜로디가 있다거나 하는 문제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지금 몰입하고 있잖아요. 그 부분은 제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 영상을 볼 때마다 입이 따라 벌어진다고 했었죠. 목을 까닥거리게 되고 음의 높낮이에 따라서 괜히 움찔거리게 됩니다. 마치 스코필드와 하나의 몸이 되어 내가 연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나도 막 기타를 잘 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기분이 듭니다. 몰입이 전염되는 순간이죠.


몰입이 전염되는 순간은 왜 감동적인가. 몰입은 그 사람의 진심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거짓말하는 사람의 머릿속은 변명으로 가득 찹니다. 그런 말이 있죠.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은 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딴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죠. 몰입은 그 사람의 진실한 마음을 전달하고 그 전염의 순간에 관객은 감동을 받습니다. 봉준호를 주제로 한 글에서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진심이 강렬하게 전달되는 순간에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생각을 안 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된다. 저는 송강호가 몰입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송강호는 '인물을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연기라는 행위는 인물의 진심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려는 예술이니까요.


몇 해 전에 저는 군대에 있었습니다. 한창 추운 겨울이었어요. 한적한 주말의 오후였습니다. 그날따라 괜히 조용하고 적막했어요. 잡일도 없고 말이죠. 심심했던지 축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축구하면 사족을 못 썼기 때문에 그날도 같이 축구를 했습니다. 달리다 보니 열이 나잖아요. 날씨가 추웠는데도 사람들 대부분 웃통을 벗었습니다. 그렇게 한창 플레이하고 있는데 순간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어요. 무척 생생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사방에 눈이 와 하얗게 둘러진 운동장 위에 제가 서 있습니다. 숨은 턱 끝에 차 있는데 전혀 힘들지 않아요. 분명 공기는 차가운데 몸은 따뜻합니다. 옆으로 까까머리한 사람들이 반나체로 뛰어다니는데 그게 꽤나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요. 멍 때리는 느낌이 들면서 몸은 붕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복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기 때문에 저는 그 생각을 확신했어요. 한 치도 의심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의 경험은 몰입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생각이 멈춘 가운데 몸의 감각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확신에 찬 행복감을 느낍니다.


몰입을 설명하는 다른 예시도 있습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헝가리의 저명한 심리학자로서 몰입(Flow) 이론의 대가로 통합니다. 그는 한 강연에서 몰입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70년대 유명했던 어떤 음악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죠.


(몰입을 하게 되면)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무아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저는 이걸 몇 번이고 경험했어요. 연주하던 손의 감각이 없어지면서 지금 밖에서 벌어지는 일과 나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어집니다. 저는 그냥 앉아있어요. 놀라움과 경탄에 젖어 연주를 지켜보면서 말입니다. 음악은 저절로 나와 흐를 뿐입니다.*


인용된 말에 따르면 몰입은 무아지경인 상황에서 어떤 창작의 행위가 저절로 나와 흐르는 모양새인 것 같습니다. 저는 송강호가 말하는 '생각을 안 하는 연기'의 모양새가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지금 내가 맡은 인물에 온전히 몰입해서, 송강호의 생각은 무아지경 속으로 사라지고 인물의 행동만이 저절로 나와 흐릅니다. 그는 그냥 생각 없이 인물 속에 앉아있고 연기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를 뿐입니다. 스코필드의 즉흥연주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송강호의 몰입에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최근 <인랑>을 연출했던 김지운 감독은 송강호의 오랜 버릇에 대해 가벼운 불만을 털어놓는데요. 감독이 "컷"하기도 전에 송강호 자신이 연기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좋아! 오케이!"하고 외친다는 것이죠. 좋은 연기를 하는 데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립니다. 송강호는 분명 몰입하는 연기를 하고 있고, 몰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는 몰입의 중요성을 몸으로 증명해 보인 적도 있었어요.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는 박두만 형사를 연기합니다. 영화의 후반부, 손안에 쥔 것 같았던 유력한 용의자를 풀어주면서 박두만은 용의자에게 물어봅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이 대사는 너무나 현실적입니다. 왜냐하면 용의자에 대한 분노와 동정심, 양쪽 극단의 감정이 모두 담겨있는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조사해도 연쇄살인범을 찾을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피 말리는 수사 과정을 거치고 거칩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유력한 마지막 용의자에게 도달합니다. 그런데 DNA 조사 결과 이 사람도 용의자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죠. 우리는 좌절합니다.


그런데 관객이 아니라 진짜 현실의 형사라면 그냥 좌절감을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길고 긴 수사 과정을 거치고 받아낸 마지막 판명. 범인이 아니다. 이때 형사가 현실적으로 느끼는 건 과녁을 잃은 분노와 좌절, 그리고 용의자에 대한 연민. 모든 것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인 것입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이 대사는 박두만 형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몰입해야 할 수 있었던 대사입니다. 이 대사는 송강호의 애드리브로 알려져 있죠. 정말 박두만 형사가 할 것 같은 말입니다.


스티븐 돌드리 감독의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는 춤을 춥니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추죠. 대신 몰입해서 춥니다. 춤을 출 때 무슨 기분이 드냐는 왕립발레학교 심사위원의 질문에 빌리는 대답합니다. 몰입했을 때의 진심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해요. "그냥 좋아요. 모든 걸 잊게 되고 내가 사라져 버려요. 새처럼 날거나 전기에 감전된 것 같아요."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나면 우리는 빌리의 진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몰입했기 때문입니다. 몰입은 진심을 드러내고, 그런 진심은 보는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우리가 송강호의 연기를 보면서 느끼는 감동은 제가 스코필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우리가 빌리의 춤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송강호라는 배우가 지금 얼마나 배역에 집중하고 있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몰입하고 있는지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진심에서 전달된 감동은 우리 머릿속에 각인되어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눈 내린 운동장에서 느꼈던 확신에 찬 행복을 제가 여전히 기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 You are in an ecstatic state to such a point that you feel as though you almost don't exist. I have experienced this time and time again. My hand seems devoid of myself, and I have nothing to do with what is happening. I just sit there watching it in a state of awe and wonderment. And [the music] just flows out of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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