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Lesson In Visual-telling #6
※ 영화 <러브리스>(2017)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의 <러브리스(Loveless)>를 보고 왔습니다. <러브리스>는 사랑을 상실한(loveless) 시대를 허무하게(hopeless) 응시하고 있습니다. 느리고, 불안하고, 허망합니다. 부부의 아이인 알로샤(마트베이 노비코프)가 실종된 상황 속에서 아이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좌절하는 부부는 사랑을 망실한 채 고통받는 우리의 현재 모습과 유비됩니다.
사랑을 잃었다면 다시 찾으면 되겠죠. 그러나 우리는 가짜 행복만을 좇습니다. SNS에 행복을 과시하고, 가짜 진단서를 끊고 가짜 아내를 고용하는 우리의 맨 얼굴을 감독은 분명히 비판합니다. 시스템은 아이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고 소시민은 외부의 전쟁과 비극에 무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랑을 찾을 수 없어요. <러브리스>의 핵심적인 정서는 '사랑을 망실한 허망함'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옆자리에 앉은 관객은 한숨을 푹 쉬었고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 또한 무력한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허망함의 정서를 무자비할 정도로 정확하게 빚어냅니다. 이 정도로 진한 허무함을 느끼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영화는 어떻게 허망함을 빚어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관객에게 허무함을 전달하면 좋을까요.
영화의 정서는 일차적으로 인물의 대화를 통해 전달됩니다. 그 외 편집의 속도, 이야기의 톤, 화면의 룩과 사운드트랙 등이 관여할 것입니다. 이런 요소들은 물론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려가며 하나로 통일된 어떤 정서를 빚어내는 것이겠죠. 그런데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에서 핵심적으로 작동하는 톱니바퀴가 있기 마련입니다.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씬 곳곳에 독특한 장치를 심어놓습니다. 씬의 앞뒤로 움직임이 없는 빈 곳을 비추는 겁니다. 저는 이 장치가 <러브리스>의 백미라고 생각해요. 허망함과 쓸쓸함, 사랑을 잃은 공허한 마음을 전달하는데 무척 효과적인 장치입니다. 영화의 정서를 전달하는 데는 복잡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요. 때로는 매우 사소한 것이 영화의 탁월함을 결정하죠.
중학교 때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왠지 정이 가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왜 친하지 않았냐면 이 친구가 말수가 정말 적었거든요. 관계가 쌓이려면 대화가 필요하잖아요. 그런데 말수가 적으니 긴 대화가 안되고, 그러니 다음 관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대화량을 채우지 못하는 거죠.
그런데도 정이 간 이유는 이 친구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분위기는 말수가 적어서 만들어지는 거였어요. 게다가 말수만 적은 게 아니라, 이 친구는 항상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대화 사이에 2초에서 3초 정도 틈이 생기는 거죠. 처음엔 너무 낯설었는데 지내다 보니 그게 이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친구들에게서는 느끼지 못하는 어떤 분위기를 이 친구에게서는 느낄 수 있었어요. 마치 이 친구 주위에서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어요.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었지만 이 친구는 부모님이 안 계셨습니다. 할머니와 둘이서 살았어요. 왜 대화 사이에 공백이 있고 말수가 적고 조용조용한지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아마도 그 친구의 집은 조금 조용할 것이고, 그래서 대화가 많지 않을 것이고, 그것이 그 친구의 성격이 되었겠지, 하고 짐작할 뿐이었어요. 그렇다고 그 친구가 우울해하거나 그렇진 않았습니다. 말수만 적다 뿐이지 공부도 잘했고 축구도 잘해서 두루두루 잘 지냈으니까요.
신기한 건,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씩 그 친구가 생각난다는 겁니다. 그때 그 친구보다 훨씬 친했던 친구도 많았죠. 같이 축구하고 같이 밥 먹던 애들이요. 그런데 그중에선 아예 얼굴을 잊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얼굴도 이름도 생각이 안 나요. 꿈속의 인물처럼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죠. 그런데 그 친구는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그 친구가 말을 꺼내기 직전 잠깐 침묵했던 짧은 순간까지 생각나요. 저는 그 순간에 그 친구의 얼굴을 뜯어보곤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그 친구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싸구려 연민이었죠. 어린 시절에 제가 뭐가 잘났다고 부모님이 없는 친구를 가엾게 여겼을까요. 하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어렸고 순진한 마음에 그랬던 거죠. 아마도 제가 연민을 느낀 기억 때문에 그 친구의 얼굴을 기억하는지도 모릅니다. 억수 같은 말을 나눴던 많은 친구들이 제 기억 속에 남은 게 아니라, 침묵 속에서 서로 바라본 적 있었던 한 명의 친구가 제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이제 다시 <러브리스> 이야기를 하자면,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이 활용하는 장치인 '씬의 앞뒤로 빈 곳을 비추기'는 제가 기억하는 친구의 대화 방식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대화 사이에 잠시 침묵하는 것. 그래서 상대방을 거기에 주목하게 하고 거기에 스며있는 정서를 상상하게 하는 것.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친구의 침묵 속에서 제가 느낀 것은 연민이었고, <러브리스>의 빈 곳에서 제가 느낀 것은 허망함이라는 사실 뿐입니다.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영화 곳곳에 이런 장치를 심어 놓았습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흰 건물이 썰렁하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관객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죠. 카메라는 건물을 계속 비추고 아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고 고요해요. 조용하고 고요한 정서에 관객들이 충분히 이입했을 때, 그제야 인물들이 하나둘씩 등장합니다. 중심인물인 알로샤가 아이들 사이에서 걸어 나옵니다.
조용하고 고요했던 정서는 영화 내내 반복되면서 점차 상실감과 허무함의 정서로 바뀌어갑니다. 부부는 장모님을 방문해 날이 선 대화를 주고받다가 퇴장합니다. 기세 등등하게 독설을 퍼붓던 장모는 딸이 사라진 다음 침묵 속에서 괴로워해요. 카메라는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보여줍니다. 대화가 지나간 뒤의 공백을 비추는 것입니다. 이런 장치의 효과는 실종된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극대화됩니다. 아이를 찾던 사람들이 화면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카메라는 빈 화면 속 앙상한 나무와 찬 바람을 계속 비춥니다. 사람들이 지나간 자리의 어지러운 폐허를 비추고, 선생님이 나간 교실의 눈 내리는 창문을 비추고, 아이를 찾는 포스터가 붙은 인적 드문 정류장을 비춥니다.
<러브리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허무함을 전달합니다. 인공조명을 쓰지 않아 어둡고 음울한 화면을 조성하고, 죽음과 자살의 테마를 반복하고, 불모의 계절인 겨울을 활용해 메마름과 황폐함을 드러냅니다. 현실적인 각본을 통해서 인물의 무너진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수미상관으로 사용된 영화 앞뒤의 틸팅(Tilting)과 알로샤의 시점 쇼트를 통해 허무하고 쓸쓸한 마음을 극대화하기도 하죠.
하지만 <러브리스>의 허망함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건 씬의 빈 곳을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인 것 같습니다. 빈 곳의 정적은 우리가 사랑을 잃었고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언을 내립니다. 그리고 반복되는 예언의 끝에 우리가 마주하는 장면은 사랑이 남긴 어떤 작은 흔적입니다. 영화의 처음에 자살처럼 암시되었던 흔적은 영화의 끝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한 추모의 리본처럼 바람에 날립니다.
영화가 끝난 뒤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건 허망한 마음과 그런 마음을 느꼈던 영화의 빈 곳들입니다. 이 영화가 그토록 허망하고 슬픈 것은 그런 빈 곳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러브리스>는 사랑이 사라진 빈자리에 관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 감독은 잔인한 정확함으로 빈자리마다 카메라를 세웁니다. 그런 빈자리들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허망함을 관객에게 전달하죠. 결국 우리가 기억하는 건 말과 말 사이인 것 같아요. 말이 없던 옛 친구를 제가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처럼, 저는 영화관을 나와서도 <러브리스>의 빈자리를 계속해서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