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 on Ar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scus Jun 04. 2019

어나더 컨트리 : 삶의 의미를 쫓는 투쟁의 명암

※ 연극 <어나더 컨트리(Another Country)>(2019)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연극 <어나더 컨트리>는 1930년대 영국의 한 사립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곳은 명문 사립학교로서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장소이고요, 두 명의 주인공 가이 베넷(Guy Bennett)과 토미 저드(Tommy Judd)는 이 학교에서 이단아로 통합니다. 두 사람은 학교 내의 폭력과 부조리에 맞서면서 각자의 이상향, 또 다른 나라(Another Country)를 꿈꿉니다.


이야기는 소련의 어느 늙은 스파이의 인터뷰로 시작됩니다. 그의 이름은 루퍼트 에버렛(Rupert Everett).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가 바로 가이 베넷(Guy Bennett)이에요. 이름을 바꾼 것이죠. 그는 학교 내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방황하다 소련으로 망명, 스파이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인터뷰어가 물어봅니다. "왜 스파이가 되셨나요?" 루퍼트는 대답합니다. "체제란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소." 그리고 이야기는 1930년대 당시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플래시백 됩니다.



이 학교는 사다리입니다. 상급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사다리죠. 사다리의 정상에 서기 위해서는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택받은 학생회(트웬티 투)에 들어가는 것, 둘째는 선도부(프리 팩트)가 되는 것입니다. 두 집단은 선택받은 소수와 그 소수의 폭력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학교는 두 집단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학생들은 두 집단에 속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가이 베넷 역시 처음에는 그들과 같습니다. 트웬티 투에 들어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정계의 핵심인물이 되기를 자처하죠. 그런데 어느 날, 마티노라는 학생이 사실은 동성애자라는 비밀이 무자비한 선생님에 의해 밝혀집니다. 마티노는 목을 매달아 자살하죠. 이 사건은 가이 베넷에게 충격으로 다가와요. 왜냐하면 그도 동성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필연적으로 당시의 시대 흐름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셈입니다. 한편 그는 학교 내의 다른 학생 하코트에게 첫눈에 반하고 곧 둘은 비극이 예정된 사랑을 나눕니다. 학교가 동성애를 발각하고 그들을 탄압하자 가이 베넷은 트웬티 투에 들어가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정치적 망명을 결심합니다.


토미 저드는 애초부터 두 집단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시대와 불화하기를 자처하는 인물입니다. 매 순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으며 막시스트로 살기를 선택하죠. 그는 가이 베넷의 동성애를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가이가 묻습니다. "네가 칼 마르크스를 읽어서 공산주의가 된 거야? 아니면 네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칼 마르크스를 읽는 거야?" 이 질문은 핵심적인데,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고나는 것인지 혹은 선택하는 것이지를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되기를 선택했다고 대답하지만, 가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고, 그저 동성애자로 태어났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플래시백이 끝나고 이야기는 다시 루퍼트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는 오랜 스파이 활동과 망명 생활로 지쳐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그는 모든 것이 허무한 듯 힘겹게 입을 뗍니다. "크리켓이 그립소."


이 마지막 대사가 놀라운 건, 이 모든 이야기는 가이 베넷에 대한 이야기도, 토미 저드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며 결국 루퍼트 에버렛의 회상과 감상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루퍼트의 시점에서 출발했다가 과거의 학교로, 다시 루퍼트로 진행되는 이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인 셈인데요. 액자식 구성의 특징은 안쪽 이야기를 바깥의 이야기가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이죠. 작가는 루퍼트의 말을 빌려 그 모든 과거의 억압과 폭력과 부조리를 그립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퍼트의 마지막 고백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물론 다양하게 읽을 수 있겠지만, 그의 고백이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투쟁했던 그때가 그립다.' 그의 운명이 동성애자든 공산주의자든, 아니면 그들의 정체성이 타고난 것이든 선택된 것이든, 결국엔 투쟁해야 얻어지는 것이 한 개인의 정체성이자 삶이라는 말로 들려요.  


어쩌면 삶의 의미란, 의미를 얻기 위한 삶의 투쟁 후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전리품이 아니라, 의미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그 순간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퍼트의 마지막 말처럼 투쟁 없는 삶은 허무한 것이고, 투쟁이 사라진 현재의 그는 비록 폭력에 억압되었었지만 억압되었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쫓았던 과거의 투쟁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나더 컨트리>는 또 다른 나라로 비유되는 이상향을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습니다. 억압이 내재된 사회를 학교라는 장소로 표상해 현실의 폭력성을 드러내면서, 그 폭력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이 이상향을 쫓을 수밖에 없음을 청춘의 아름다움을 빌어 그려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향을 쫓을 수밖에 없는 운명들의 처연함을 표현하고, 그들의 한계를 냉정하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언제나 훌륭한 이야기는 동전의 앞과 뒤를 모두 보여주는 법입니다. <어나더 컨트리>는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쫓는 투쟁의 명암을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