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코로나 시국, 프랑스에서 출산을 했다

마스크를 쓴 임산부, 그리고 코로나 검사  

어느 날부터였을까 여행을 해도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좋은 곳을 가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어떤 것 이상의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여행 중추나 삶의 지각력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매우 심각하게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즉문 즉답으로 들었던 한 마디.



"이제 아기를 가질 때가 됐구나!"



그랬다. 이제 부부의 세계를 확장해 아이가 함께 하는 삶을 그릴 때가 되었다. 아기와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의 행복과 에너지가 필요한 시기였다. 남편과 나는 본격적으로(?) 아기를 가지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출산을 한다면 프랑스에서 해야겠다고 강하게 마음을 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선물 같은 새 생명이 찾아와 주었다. 작년 12월 이맘 때쯤이었다.


@pixabay


당시 프랑스는 코로나보다는 파업의 내홍을 겪고 있었다. 파리 교통공단 RATP가 대대적인 파업을 선언했는데 나는 프랑스에 살면서 RATP에서 그렇게 대대적인 파업을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급기야 겨울날 새벽같이 나간 남편은 파리 끝에서 끝까지 센느강을 가로지르며 자전거를 달려 출퇴근을 하다가 몸살이 걸리기도 했다.


파업이 한창이던 때, 나는 초기 피검사를 위해 피검사소(라보, lavoratoire)에 가야 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왕복 6 km는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극초기인지라 안정을 취해야 하지만 할 수 없이 걸어갔다 집에 와서 보니 피비침이 있었다. 안정을 취하기 위해 침대와 한 몸인 파리의 집순이가 되어버렸다.


작년 12월은 내게 블랙아웃의 달이었다. 재차 시작된 입덧 때문이었다. 그 강도가 심해 흰 죽만 겨우 몇 숟갈 뜨는 정도였다. 드라마에서 잠깐 우욱 하고 화장실가서 뱉어내는 정도의 우아한 입덧은 양반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쓰러진 채로 올 새해를 맞이했다. 우한을 포함해 중국 등지에서 심각한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던 때인데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더니 1월 말이 되자 한국에서도 첫 확진자가 나왔다. 포털에서 연일 심각해지는 우한의 상황과 한국의 뉴스를 지켜보며, 나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안위를 걱정했다.



프랑스에서 입덧이 심할 때는 응급실을 간다  


올해 2월까지 입덧은 매일매일이 최고조 상태였다. 입덧이 가실 수도 있다고 하는 12주의 기적은 오지 않았다. 생수도 토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시기에 매일 먹어야 한다는 엽산도 삼키지 못했다. 하루는 피검사에서 칼륨 수치가 낮게 나와서 심장 박동수가 높아진 것 같으니 응급실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피검사소에서 따로 연락을 해왔다. 한국은 근처 산부인과나 다니는 출산 병원에 언제든 입덧으로 방문하면 수액이나 영양제로 산모의 건강을 챙겨주지만,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곳은 출산 병원의 응급실에 가야 한다. 의료 분업이 굉장히 세분화되어있기 때문에 링겔을 꼽고 수액을 맞는 행위 등은 병원의 응급실에서 가능했다. 그렇게 간 응급실에 입덧 수위를 낮춰준다는 진통제 수액, 전해질 수액을 맞았다. 이때만 해도 힘들었지만 그나마 마스크 없이 방문할 수 있었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임신 12주가 넘어가고도 여전히 하루에 10번 이상 인간 믹서기가 되어 고난의 여정을 이어갔다. 솔직히 너무 힘드니까 아기를 이렇게까지 해서 가져야 하는지 매일같이 반문을 했었다. 이제는 위산역류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덧 레전드를 찍었다. 4일 간 1끼만 소화를 시켰던 것이다. 밤새 위산 역류로 몇 초마다 끙끙대던 나는 자고 있던 남편을 깨워 응급실로 향했다. 초록색 쓸개즙 토를 하는 걸 본 출산병원의 간호사가 내 앞에서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구토억제제 수액을 맞고 피검사를 했다. 2월 초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자체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응급실에 들어갔다.


열흘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남편이 갑자기 콜록대며 기침을 심하게 하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마을에서 열리는 주간 장날에 나가 오징어를 몇 마리 사온 것 이외에는 접촉한 사람은 없었다. 특히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접촉한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감기일 거라 추정하다 며칠이 더 지나서 제네럴리스트 의사를 방문했다. 임산부 아내가 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의사를 보러 왔냐며 의사에게 혼이 난 뒤 독감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다음 날 남편은 이제 나아가는데 이제는 내가 기침을 하고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2월 중순이었던 이때부터는 병원 위주로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던 때라 여전히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제네럴리스트를 보러 갔다. 그녀는 독감이 확실한 것 같지만 소견서를 써 줄 테니 출산병원 응급실에 가보라고 했다. 소견서를 들고 또 출산 병원 응급실에 갔다. 병원 의사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병원 정기구독 했냐는 프랑스식 농담을 건넸다. 응급실 의사들이 알아보는 사람들이 됐다니, 나의 출산 여정은 시작부터 왜 이렇게 험난한 걸까!


코로나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심해지던 때라 의료진들은 우선 독감 검사를 해보고 아니면 코로나나 폐렴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했다. 콧속으로 면봉을 깊게 찔러서 A형, B형 독감 검사를 했다. 둘 다 음성. 식은땀이 났다. 어느 하나는 양성이 나와야 독감인 건데. 잠시 생각하던 의사는 이 검사지가 B형 독감 양성을 잡아내는 데 취약하니까 B형 독감 전문 검사지를 따로 써보자고 했다. 다시 콧속을 찔러 기다린 결과는 양성. 그렇게 나는 B형 독감에 걸린 임산부가 되어 타미플루를 처방받았다. 그러고도 응급실은 내 피를 몇 통씩 더 빼갔다. 마크롱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큰 코로나 대응 지정병원이었던 파리의 출산 병원이었던지라 코로나 확산 초기 단계에서 응급실에서 내 상태에 대한 관심이 컸던 것 같다.


@pixabay


약을 먹었다는 죄책감, 그렇지만 괜찮아  


입덧약도 거의 매일 먹었는데 이번에는 타미플루라는 약을 먹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응급실 산부인과 의사도 문제없다고 했지만 혹시나 만약의 경우란 것을 생각했다. 독감 예방 주사를 맞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항생제, 입덧약 도노흐밀, 다음 단계인 입덧약이라는 프랑페랑, 독감약 타미플루, 저용량 아스피린, 제산제 개비스콘, 역류성식도염 약 에소프라메졸... 임신 기간 먹은 약들을 매일같이 검색하고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초기 유난을 떨며 샴푸, 린스, 치약에 유해 성분이 없는 것을 골라 사서 쓰기까지 한 노력이, 이렇게 약들을 먹음으로써 물거품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타미플루를 일주일 간 다 먹어갈 때쯤 응급실에 연락해 피검사 결과를 들었다. 독감이 맞으니 폐렴을 대비해 먹게 했던 항생제 복용을 중단해도 된다고 했다. 코로나나 폐렴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때 먹은 약들은 임신 중에 복용해도 괜찮은 안정성이 확보된 약이라고 들었다. 걱정하는 시간은 있었지만 나중에 아기는 너무 건강하게 잘 태어났다.)



태교 여행은 꿈도 못 꾼다니!  


프랑스에서는 2월부터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생기다가 3월 중순부터 하루 확진자가 1000명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이때가 임신 16주를 지나가며 기적처럼 심한 구토를 하는 입덧 증상이 가라앉기 시작해서 태교 여행을 꿈꾸던 때였다. 전부터 임신하면 태교 여행을 어디로 갈까 행복한 고민을 했었던 나였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하루하루 죽어나가는 마당에 각국은 봉쇄되니 태교 여행은커녕 당장 집 안에서 밖으로 나가기도 겁나는 상황이 되었다. 이쯤되니 태교 여행이 문제가 아니라 어디 나가 사람을 마주치는 것조차 불안한 마음이었다. 이제는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프랑스에서 사는 나를 걱정했다.



접촉 대신, 접속을 통한 랜선 수다   


이때부터였을까. 프랑스에서 같은 시기에 임신한 사람들을 모아 단톡방을 만들었다. 거기에 모인 비슷한 처지의 임산부들은 지금 이 시국에 대해 토로하며 불안해 했다. 불안해 하다가도 괜찮을거라며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 그러다가 보글보글 끓는 맛있는 한국의 음식이 먹고 싶다고 다들 한 목소리로 당장 먹고 싶은 한식들에 대해 열띤 대화의 장을 펴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이 시기를 힘들지만 또 그 와중에 긍정적으로 보내보려고 하는 건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하루하루 버텼다. 사람들과의 접촉이 아니라 접속을 해서 모인 임산부들과의 대화였다. 프랑스에 살면서 오랜만에 다른 한국분들과 연결하려고 한 노력 덕분인지 예정일이 비슷한 분을 알게 되기도 했다. 랜선 수다의 특성 덕인지 출산 후에도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거기, 남편은 들어오지 마세요


프랑스에서는 임신 기간 동안 크게 3번의 초음파를 봐준다. 다른 이유로 필요하거나 개인적으로 다니는 산부인과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으면 따로 보면 볼 수는 있기는 하다. 하지만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공식 초음파 횟수는 초기, 중기, 후기 딱 3번이다. 내 경우는 두 번째 초음파를 볼 때 남편이 초음파실에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 상상속에나 그려보던 얼굴 모습을 입체초음파로 나 혼자 보게 되었던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초음파 사진을 받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모습의 감동을 함께 누리지는 못했다. 세 번째 초음파 때에도 아기의 얼굴을 혼자 보았다. 하지만 이건 출산병원의 의료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사태는 장기화되고 나도 점점 막달을 향해갔다. 이제는 출산날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올 수 있을지 없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다른 출산병원들에서 분만을 기다리는 임신부들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분만실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병원 입원 기간 동안은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든가, 낮에 같이 있다가 밤에는 나가야 한다든가 병원마다의 룰이 달랐어서 각자 출산하는 병원에 확인해보는 게 제일 빨랐다.



매달 피를 몇 통씩이나 뽑아가는 거야?


프랑스에서는 한국에서 하지 않는 특별한 피검사를 한다. 그건 ‘톡소플라즈마’라는 균 검사인데 이 항체가 있는지 여부가 임신 기간 동안 삶의 질에 꽤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항체가 없는 임산부는 매달 피검사소에 가서 피를 약 3통씩 빼고 수치를 확인해야 한다. 날것을 먹거나 오염된 식재료, 고양이 분변이 닿은 토양에서 난 야채 따위를 섭취할 경우 원충이 태반을 통해 태아로 전염되는 태아감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검사이다. 올해 랜선으로 접촉했던 프랑스에서 임신한 한국 여성분들 중 이 균에 대한 항체가 있다는 분은 보지 못했다. 한국 토양에서는 이 균이 살아남기 어려워 위험성이 크지 않고 그렇다보니 대개 항체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결국 나도 한국인을 인증하듯 항체가 없다고 나와서 코로나 시국 매달 피검사소에 가서 줄을 서게 됐다.


3월부터는 전세계 펜데믹이 선언되고 하루하루 무시무시한 숫자의 사람들이 재활 치료에 들어가고 사망하고... 점점 사람들은 피검사소가 여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길게 줄을 늘어서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 했다. 초기에는 증상이 있을 경우에는 피검사소에 직접 오지 말고 전화로 먼저 문의하라고 했는데 보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피검사소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코비드 검사하러 왔다는 사람이 바로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한 공간에 있었던 경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톡소 항체가 왜 없어서 이 난리냐며 피검사를 마치자마자 코를 막고 검사소 문을 뛰어나갔던 기억이 난다.


살면서 처음으로 임산부, 노약자 전용 패스트 트랙에 줄을 따로 섰다. 그런 나를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대로 자신의 차례를 양보하고도 문을 잡아주며 예의를 베풀어준 사람들도 있었다. 내 배가 나온 걸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한 할아버지는 내 뒷모습에 대고 왜 새치기를 하냐며 큰소리를 냈는데 배가 불룩 나온 내 모습을 확인하자 얼굴이 붉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 뿐인가. 임신했다고 왜 패스트 트랙에 서 있어야 하냐고 혼잣말하던 사람도 있었다. 나는 피검사소 앞에 줄을 설 때마다, 코로나 시국에 누구보다 빨리 검사를 받고 싶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걸 느끼곤 했다. 언젠가부터는 짧은 줄에 단 10분도 서 있는 게 힘들었는데 그때 임산부는 왜 모든 주차에 보호를 받아야 하는가 절실히 알게 되었다.


피는 또 왜 이렇게 많이 뽑는지... 매달 길쭉한 통에 최소한 3 통은 뽑았고 한 쪽 팔은 혈관을 찾기 어려워서 다른 한 쪽 팔에서만 집중적으로 피를 빼야 했다. 나중에는 한 쪽 팔만 보면 어디 아파서 주삿바늘을 많이 찔러 맞았거나 약한 사람처럼 보였다. 검사 목록이 길어지는 달에는 8 통을 빼가기도 했다. 한 통, 많아야 두 통만 빼가고도 다양한 검사가 쭈르륵 가능한 한국의 피검사까지 고향의 것이 그리워질 정도였다. 어쩌면 주구장창 피만 뽑다가 임신 기간 다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스크를 끼고 하는 출산, 그리고 코로나 검사  



마침내 유도 분만으로 출산일을 결정하게 되었다. 긴 이야기 짧게 요약해 16시간 진통을 해 자궁문을 열어주었으나  결정적으로 아기 머리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슬픈 이야기인 걸로만 써둔다. 마스크는 의료진이 분만실에 들어올 때는 꼭 챙겨서 써야했다. 막판에는 갑자기 몸의 체온이 올라가서 의료진은 내가 코로나에 걸렸나 하는 의심도 잠시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머리가 내려올 생각이 없어보여 응급제왕을 결정해 수술실로 옮겨졌다. 아기는 5분 만에 그 미지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수술이 끝나고 나는 코로나 환자 이송이나 접촉 의료진과는 엄격하게 분리된 엘리베이터에 태워져 회복실로 내려갔다. 마취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콧속을 찌르는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됐다. 체온도 체온이었는데, 내가 있었던 분만실에 출입하던 사람이 코로나 확진이 떴다는 소식이었다(!)


방금 막 출산을 마친 산모라 응급으로 검사를 돌렸는지 몇 시간 이내로 결과가 나왔다. 다행이자 당연하게도 결과는 음성. 마지막 날까지 코로나에 대한 긴박한 우려 속에 출산을 마치고 마침내 세상에 나온 아기와 조우하게 된 기쁨을 누렸다. 생애 처음 겪는 임신과 출산. 그것이 해외였고, 프랑스였고, 코로나라는 역병이 돈 해였다. 많은 불안감과 걱정 속에서 프랑스의 출산을 해내며 고난의 여정은 마무리가 되었다.





프랑스의 국립 출산병원은 친절하지 않다. 질문하면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편이지만 먼저 나서서 이것저것 알려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마다 그리고 출산 병원마다 다르겠지만. 그래서 나는 한국의 맘카페를 들락날락하며 선수학습한 것들에 대해 의사에게 질문하면서 임신 기간 자잘한 증상으로 밀려오는 불안함을 그때그때 달랬다. 맘카페에 오래전 질문과 답변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많은 한국의 엄마들, 오래전에 남긴 글에 질문을 했을 때도 지나치지 않고 바로 친절하게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들이 있어서 타지에서의 출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사람은 저마다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기가 꽉 쥔 손을 스르르 풀자 비로소 손에 아로새겨진 운명의 물결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그 물결이 휘몰아 나가는 시작점, 거기서 우리는 마침내 마주했다. 이제 나는 프랑스에서 엄마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 아이들이 받았던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